이혜숙 < ks+partners 이사 hslee@ks-ps.co.kr >

'남산 걷기,가능하신 분들은 내일 10시에 남산 주차장에서 만나요.'

회사 게시판 글이 신선했다.

때마침 예정된 미팅도 취소돼 팀원들과 함께 평일 대낮에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봄이 반쯤 걸쳐진 산의 풍경은 완연한 봄을 뽐내는 산보다 한결 다정했다.때를 기다리는 자의 겸손함이랄까.

천천히 남산공원을 둘러본 후 남산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국립극장을 지나 동국대 캠퍼스를 옆으로 보며 천천히,그러나 두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겼다.산책로에는 우레탄이 깔려 있는 데다 500m,1000m,친절한 거리 표시까지 있어 왕복 6㎞의 여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되도록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걸었다.걸음 옮기기가 그다지 힘들지 않으니 머리가 더 맑아졌다.대화 속,회의 속,논쟁 속에서 답을 찾아 온 직업병 탓인지,나는 침묵에 익숙하지 않다.부부 싸움도 반나절을 못 넘긴다.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침묵을 견디는 인내심이 부족한 탓이리라.

입은 한일(一)자로 꾹 다물되 가슴과 머리는 활짝 열었다.침묵에 빠지니 내가 보이고,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명징하게 보였다.맑은 공기가 내 속으로 들어와 속삭였다.'너를 괴롭히는 많은 일들은 스트레스가 아니라 즐거운 긴장이며 자극'이라고.걸음에 탄력이 붙으며 가슴이 터질 듯 행복한 기운이 차올랐다.단지 한 시간 반 동안 걸었을 뿐인데,남산은 나를 '네거티브 인간'에서 '포지티브 인간'으로 바꿔 놨다.

얼마 전 뉴욕 센트럴파크를 걸었을 때도 비슷한 행복감을 느꼈었다.존 레논이 살았다는 다쿠타 아파트를 지나 스트로베리필즈를 거쳐 센트럴파크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걸을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란 확신까지 들었었다.동시에 뉴욕의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존 레논의 '이매진'도 브로드웨이의 멋진 뮤지컬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모두 센트럴파크 덕분인 것 같아서 질투도 났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남산'한테 미안했다.센트럴파크는 비행기 타고 열 몇 시간을 날아가야 하지만 남산은 집에서 5분,회사에서 20분 거리에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센트럴파크보다 멋진 보물이 코앞에 있는데,바다 건너 남의 것을 질투하고 있었으니….남산뿐 아니리라.바로 옆으로 고개만 돌리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들이 미소 짓고 있는데,손짓하고 있는데,우리는 너무 멀리서 보물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보물은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