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宗奎 <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 저축을 열심히 하던 국민이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저축률이 높나?' '왜 한국의 저축률은 자꾸 올라가기만 하나?'를 놓고 뜨거운 학문적 논쟁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쓸데없이 돈 쓰고 다니는 것,남에게 돈 자랑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으며,땀 흘려 일하고 절약해 모으는 일을 가치 있게 평가했었다. 그러던 사람들이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딴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이제 우리나라보다 저축을 안 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은행이 가계대출을 50%씩 늘리던 2000년을 전후해 불과 3년 만에 가계저축률은 무려 15%포인트나 급락했다. 1980년대 중반 20%를 넘던 가계저축률은 2002년 1.4%까지 내려간 뒤 여태껏 5%를 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왜 갑자기 저축률이 내려갔나?''왜 한국의 저축률은 올라가지 못하나?'를 새로운 연구주제로 삼아야 할 상황이다.

저축과 소비에 대한 인식이 확연히 달라진 것은 외환위기 이후였다. 성장률이 급락하던 1998년에는 위기의식 때문에 가계저축이 급증했다. 과도한 저축보다는 소비를 권장할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저축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살림이 궁핍해진다는,경제학 교과서에 조그맣게 나오던 '검약(儉約)의 역설(逆說)'을 언론매체를 통해 심심찮게 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권장에 누구보다 적극 호응했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최저소득 계층의 가정(家庭)들이었다. 1998년 최하위 10% 계층의 전체 평균 대비 상대적 소득은 6.2%포인트 하락했지만 상대적 소비지출은 오히려 1.1%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2003년과 2004년의 내수침체 기간에도 정책의 기본 방향은 저금리를 통해 소비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금리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금리인상은 빚 많은 저소득층에 타격을 준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저소득층 생각을 끔찍이도 해준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는지,이번에도 최저소득 계층은 자신의 소득 감소에도 불구하고 소비를 별로 줄이지 않음으로써 당국의 정책방향에 적극 호응했다. 2003년과 2004년 최하위 10% 가정의 전체 평균 대비 상대적 소득은 4.4%포인트 하락했지만 상대적 소비는 1.3%포인트밖에 줄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의 귀결은 최저소득 계층의 가계부 적자확대 및 가계파산으로 나타났다.

조만간 소득이 늘어난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빚에 의존하기보다 씀씀이를 줄였어야 했다. 남의 말만 믿고 빚 무서운 줄 몰랐다면 그것은 자기 책임이다. 먹이고 싶은 것 제대로 못 먹이고,보내고 싶은 학원도 마음대로 못 보내는 가슴 아픈 심정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마음을 아주 독하게 먹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빚 권하는 사회'가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절약'과 '내핍'이란 말들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결혼을 하면 일단 단칸방에서 시작해 전세로 옮겨가고,작은 내 집을 장만하며 평수를 넓혀가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살아왔었는데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사회 초년생들이 빚을 내 집 장만하는 데 애로가 없도록 정부와 금융회사가 발 벗고 나서 도와준다. 대부업체들은 누구에게나,당장에라도 돈을 빌려준다는 광고만 내보낸다. 높은 이자를 물어가며 원금을 갚는 것이 얼마나 힘에 부치고 스트레스받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는다.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翼) 선생은 "가난한 살림살이에 가장 해로운 일은 빚을 쓰게 하는 일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 250여년 전 말씀이지만 오늘날에도 역시 옳은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대책을 내놓든지,그런 묘안이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빚을 권하는 대신 절약과 내핍을 권해야 할 것이다. 말로는 저소득층을 생각해 준다면서 실제로는 해를 끼치는 모습은 더 이상 옆에서 보고 있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