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우 < 고려대 정경대학장·경제학 > 시장부문과 공공부문으로 구성돼 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공공부문의 주체인 정부의 원활한 기능과 역할은 예산을 통해 반영된다. 예산의 적정 규모와 이를 뒷받침하는 세제가 지향해야 할 중심철학의 정립은 국가경제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정부가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를 반영하는 기본 척도로서 9월 정기국회를 예산국회라 일컫는 것도 이것이 중차대한 과제임을 입증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 우리 재정은 '세입 내 세출'원칙을 지켜왔으며 이를 준수하기 위해 세출요소가 있을 경우 국공채 발행보다는 세목을 도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건전재정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재정의 건전성이 크게 훼손됐다. 외환위기 이후 실업대책,잠재성장률 하락에 따른 경기 대응적 재정지출수요의 증가 등이 중첩되며 매년 재정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예상대로라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처음으로 빚을 내 적자재정을 편성한 이후 2009년까지 12년 동안 적자재정이 이어지게 된다. 여기에다 환율안정을 위한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이 급증하면서 국가채무가 늘고 있어 전문가들의 우려를 낳고 있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1997년 말 GDP 대비 12.3% 수준인 60조3000억원이던 국가채무가 8년 만인 올 연말엔 248조1000억원(30.4%)에 이르며 2008년 이후부터는 3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낮다고 해서 우리 재정이 OECD 국가들보다 건전하다고 할 순 없다. 국가채무의 적정성에 대한 판단은 국가채무비율의 절대적 수준보다는 국가채무비율이 증가 추세인가와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가가 중요하다. 선진국들의 국가채무비율은 일본을 제외하곤 1990년대 중반 이후 안정돼 있거나 줄어드는 추세다. 반면 국가채무비율이 GDP의 20~30% 수준인 개도국의 경우 오히려 재정건전성이 의문시되는 사례가 많으며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에서 항시 경각심을 갖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면서 세입기반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조세경쟁에 따른 법인세율 인하 등 각종 세율 인하로 인해 세수기반의 약화와 더불어 한은잉여금 등 세외수입도 감소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대형 국책사업,자주국방,통일비용 등 점증하는 재정수요와 4대 공적연금재정의 부실화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재정건전성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년 예산안에서 재정건전성을 추구하면서 국정과제가 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는 방안의 모색에 심혈을 기울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어려운 재정여건을 감안해 불요불급한 대형 국책사업을 장기 추진과제로 미루는 방안도 마련돼야 했으며,자주국방으로 인한 국방비의 증가를 완화할 수 있는 대안의 연구검토,남북경제협력비용의 효율화 방안 등도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들이다. 이러한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한다면 두자릿수의 증가율(10.8%)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유지시킨 사회복지지출은 사회안전망 종합대책을 중심으로 재검토하는 지혜가 요망되고 있다. 경기가 나쁠수록 복지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장을 희생양으로 삼아선 곤란하다. 예산을 통한 사회안전망 확충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다. 과거의 재정적자는 경제위기와 관련된 세수의 급격한 감소와 경기활성화 및 구조조정 등의 세출증가에 기인했으나 앞으로는 경기에 무관한 구조적인 재정적자가 재정건전성을 저해할 우려가 높다는 점에서 재정건전화의 노력이 배가돼야 할 것이다. 건전재정 복원의 내실있는 달성을 위해서는 '재정안정화 특별법'등 법적 장치의 뒷받침도 적극 고려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