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동서고금의 명작이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기억하도록 만드는 건 그 때문이다. 셍케비치의 ‘쿠어바디스’는 로마의 기독교 탄압,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와 김동인의 ‘붉은 산’은 일제의 만행과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뿐이랴. 미술도 마찬가지다.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은 수확이 끝난 들에서 이삭이라도 알뜰히 챙겨야 했던 19세기 프랑스 민중의 생활,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때 자신의 몸을 던져 시민을 구한 칼레시의 지도자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의 끔찍한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스페인 내전은 1930년대 중반 국가주의자와 공화파의 갈등으로 시작돼 전자를 지원하는 독일 이탈리아와 후자의 편을 든 프랑스 소련 등의 대리전 양상으로 번진 싸움이다. 내란중이던 37년 4월 26일 나치는 프랑코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민간인 1천5백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곧바로 소름끼치는 상황을 담은 ‘게르니카’를 제작,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했고 이로써 나치의 만행은 온천하에 알려졌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 창에 찔린 말 등이 극적인 기하학적 구도와 흑백에 가까운 무채색으로 처리된 작품은 추상적 표현에도 불구, 전쟁의 참혹함과 민중의 분노 슬픔을 한눈에 전한다. 콜롬비아의 페르난도 보테로(73)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만행을 고발한 ‘아부 그라이브’라는 작품으로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보테로는 사람을 유독 뚱뚱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 철사처럼 가늘고 긴 인물상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자코메티와 대조적인 셈. 96년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개최, 경주 힐튼호텔 로비에 작품이 걸려 있다. 공개된 그림을 보면 전신 혹은 하반신이 벗기운 사람들이 곤봉으로 구타당하거나 온갖 형태로 성적 모독을 당하는 장면 등이 예의 뚱뚱한 인체를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라크판 게르니카라는 ‘아부 그라이브’가 피카소 작품 만큼의 공감과 생명력을 얻을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작품이 남아있는 한 아부 그라이브의 포로학대 사실이 잊혀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뿐.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