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기있는 독일 정치인이자 녹색당의실질적 최고 실력자인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이 입국사증(비자)과 관련된 범죄 스캔들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독일 하원은 17일 외무부의 허술한 비자 발급 업무를 틈타 인신매매한 여성들을독일로 대량 입국시키는 등 조직범죄단이 활개친 사건의 경위를 캐내기 위한 여ㆍ야공동 조사위원회를 가동했다. 야당은 특히 범죄수사를 담당하는 내무부는 물론 외교 실무자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피셔 장관을 비롯한 외무부 고위 책임자들이 무리하게 비자발급 규정완화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됐다며 벼르고 있다. 야당은 정책을 주도한 피셔 장관과 루트거 폴머 전(前)차관이 문제점 보고를 받고도 묵살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공세를 펴면서 임박한 일부 주의회 총선에 이 문제를 활용할 심중을 내비치고 있다. 언론이 이번 사건의 경위와 문제점들을 속속 파헤치며 파장이 커지자 폴머 전차관은 피셔 장관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했으나 결국 녹색당 외교 담당 대변인직과하원 외교위 간사직을 사임했다. 피셔 장관은 지난 한 달 가량 소란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다가 이번 주 들어서야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현재 사민당과 녹색당이 지연작전을 펴고 있으나 피셔 장관의 하원 조사위 청문회 출두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까지청문회 증언대에 설 가능성도 있어 적녹연정은 고민하고 있다. 또 이번 사건과 관련해 거의 모든 신문들이 피셔 장관의 처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진보 일간지 타츠의 경우 녹색당의 대부인 피셔 장관의 탈당 문제까지거론하는 등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파문의 발단은 지난 1999년 외무부가 비자발급 규정을 대폭 완화하고 이듬해에훈령을 통해 완화폭을 더욱 확대한 정책이다. 이는 1988년 총선에서 집권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립정권이 `개방적이고 외국인 친화적'인 대외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한 것이다. 종전에는 비자 신청자가 독일을 방문해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되돌아갈 수 있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신분과 재정 상태, 방문목적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훈령 이후엔 대사관 실무자들은 "의심이 날 경우 여행의 자유를 먼저 고려하라"는 경구에 따라 매우 관대하게 비자를 내줬다. 특히 외무부와 내무부 허가를 받은 특정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여행자 보험 증서를 제출하면 독일 내 초청자의 보증이나 까다로운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됐으며, 야행사가 비자 신청을 대신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1장에 98유로인 여행자 증서가 동구권 국가에서 불티나게 팔리며 품귀 사태가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에선 이 틈을 타 조직범죄단이 개입해 독일 입국을책임져준다는 조건으로 1장에 1천유로까지 웃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범죄단과 여행증명서 발급회사 직원이 짜고 형식적인 조사만 했으며, 인신매매되거나 돈을 벌 목적으로 자원한 여성들이 독일로 대거 입국해 매춘에뛰어드는 등 비자발급이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됐다. 동구권 주재 대사관들은 밀려드는 비자신청을 처리하느라 다른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예컨대 훈령 발령 이후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관이 발급한 비자는 30만건으로 무려 2배로 늘어났다. 또 당초부터 이 훈령에 반대한 내무부와 산하 수사기관들은 물론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관도 문제점들을 거듭 보고했으나 묵살됐다고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베를린=연합뉴스) 최병국 특파원 choib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