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하게 비틀거렸다, 마치 '그랑 파 디브레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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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영국 시인 T.S.엘리엇 (T.S.Eliot, 1888~1965)의 대표작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시구이다. 4월의 찬란함과 강한 생명력을 T.S.엘리엇은 ‘잔인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학창 시절 ‘잔인한 4월’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야 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이 계절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는 그 찬란함, 그 잔인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달인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이번 4월의 가장 큰 이슈는 뭐니 뭐니 해도 선거이다. 각자의 정치적 색깔과 입장이 다르다 보니 선거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울고 웃었고, 그 현장에는 죽음의 고통과 새로운 의지가 교차하고 얽히는 모습을 읽었다.
4월, 선거 안에 흐르는 정반대의 감정선을 지켜보고, T.S.엘리엇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 다른 에너지가 공존하는 발레 동작을 떠올리게 된다. 그 동작은 ‘그랑 파 디브레스 (grand pas d’ivresse)’이다. 이 동작은 19세기 고전발레부터 등장했던 것은 아니고 발레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과 표현이 확장되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움직임이자 용어이다.
언어 그대로 뜻풀이를 하자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동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 동작에서 생명을 느끼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 동작과 용어는 발레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개인적으로 이 비틀거리고 죽어가는 동작에서 생명력을 느낀 건 프랑스의 저명한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 (Angelin Preljocaj, 1957~)가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만든 <스노우 화이트 (Snow White, 2008)>를 통해서였다. 독사과를 삼킨 백설공주는 영 깨어날 줄 모르고 누워있고, 백설공주를 발견한 왕자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를 쓰는 바로 그 장면에서 이다.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더해져 어떻게든 백설공주를 깨워보려는 왕자의 노력과 절망은 가슴이 옥죄어 올 정도로 애처롭기만 하다. 들어 올리면 떨어지고, 업으면 미끄러져 내려가 도통 혼이 돌아올 것 같지 않은 백설공주. 하지만 힘이 풀려 비틀거리고 쳐지고 늘어진 백설공주의 몸짓을 표현해야 하는 무용수의 에너지 상황은 정반대이다.
마냥 늘어져서 상대 무용수에게 안기고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와 호흡으로 그 장면을 소화해야 한다. 즉, 관객에서 보이는 것은 죽어가는 모습이지만 그 장면을 만드는 무용수는 여전히 단단하게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랑 파 디브레스가 잘 드러난 장면이다. 마침내 독사과는 빠져나오고 백설공주와 왕자는 생명을 다시 찾은 환희를 만끽하게 된다. 그런데 그랑 파 디브레스가 <스노우 화이트>에서 처음 등장한 건 아니다. 이런 비틀거리는 동작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처음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영국의 안무가 케네스 맥밀런 (Kenneth MacMillan, 1929~1992)의 작품 <마농 (Manon, 1974)>에서였다. 아베 프레보 (Abbé Prévost, 1697~1763)의 소설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 1731)>를 모티브로 만든 이 작품은 청년 데 그리외와 마농의 사랑을 담고 있다.
그랑 파 디브레스가 등장하는 건 마농이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다. 쥘 마스네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죽어가는 마농과 절규하는 데 그리외의 몸짓은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든다. 죽어가는 그 순간, 작품의 생명을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는 것이다. 케네스 맥밀런의 작품은 늘 극단적인 비극을 표현한다. 그랑 파 디브레스라는 용어가 그의 작품을 통해서 탄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발레사에서 충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안무작 <마이얼링 (Mayerling, 1977)>에서도 그렇다. 합스부르크의 왕가의 루돌프 황태자와 연인 마리 베체라의 자살사건을 소재로 다룬 이 작품에서도 처절하면서 관능적인 그랑 파 디브레스가 펼쳐진다. 그랑 파 디브레스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들어가 있다. 보이는 건 죽음이지만 그 안에는 힘이 있고, 그걸 구현하는 무용수가 절대로 호흡과 에너지를 놓치고 있지 않다는 건 중요한 점을 말해준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4월.
어쩌면 땅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보일 뿐, 여전히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랑 파 디브레스가 갖는 이중적인 색깔을 통해 잔인함 속에 찬란함을 읽고,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을 생각하게 된다. 드러난 결과가 원하는 것이었든 아니든, 거기서 어떤 면을 볼 것인지, 이후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단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