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 작년 소수정권으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는 한가지 꿈이 있었다. 여당다운 여당을 가져봤으면 한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대선에서 이겨 집권은 했지만 거대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기 일쑤였다. 그 꿈은 금년에 이루어졌다. 17대 총선에서 과반수 여당이 탄생했고 노 대통령은 탄핵 후 승자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전혀 새로워지지 못했고, 또 새로운 것을 내놓지도 못했다. '상생정치'는 공수표가 됐고 '민생정치'도 실종됐다.한 해의 정치를 결산하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벌거벗은 나목(裸木)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뿐이다. 왜 우리에겐 '겨울공화국'처럼 가을과 겨울의 정치만 있을 뿐, 희망의 봄과 풍성한 여름의 정치가 없을까. 수를 앞세우며 자신들이 원하는 법안을 '개혁입법'으로 작명하고 반대하면 반개혁세력으로 모는 독선과 편협함, 야당이나 관련 사회세력과의 합의나 절충점을 찾기보다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는 모습, 사법부를 삼권분립에 의한 합법적 헌법기관으로 생각하기보다 국정의 걸림돌로 생각하는 태도, 이 것들이야말로 한결같이 '불임정치'의 원인일 터이다.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부·여당이 국정혼선과 관련해 '거대야당의 횡포' 대신에 '헌재의 횡포'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이야말로 대선과 총선 승리를 새삼 반추해 보아야할 때다.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선수의 입장과 같은 것일까.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선수는 그동안 자신을 성원해주고 뒷바라지를 한 사람들에게 사의를 표하고 계속해서 '오빠부대'나 '팬클럽'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만 표명하면 된다. 승리에 대해 향유할 것만 남은 것이다.민주선거에서 승리해서 집권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와 다르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민주주의에 대한 맥락없이 '사전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이겼다는 것이다. 눈물을 많이 흘렸건, 인터넷 소통을 많이 활용했건,상대방보다 경쟁적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쟁과 승리의 '맥락'이다. 맥락적 의미없이 어떤 개념을 자구적으로만 사용하면, 개념이 왜곡된다. 예를 들어 '오빠'에 대한 사전적 의미만을 찾고 맥락적 의미를 모른다면 그 온전한 뜻을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오빠를 진정으로 사랑해"라고 말할 때, 이 '오빠'의 개념을 혈육간의 '오빠'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 쏜다"고 말할 때 맥락없이 그 개념을 사용한다면, 총을 쏘는 사격선수나 화살을 쏘는 양궁선수를 뜻한다. 하나 여러 친구들이 있는 상황에서 '쏜다'고 했다면, "친구들에게 한턱 내겠다"는 뜻일 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은 전쟁에서 '이기고' 게임에서 '이겼다'는 의미와 같을 수 없다. 전쟁에서 이겼다면 당당하게 전리품을 챙기고 점령군으로 군림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승리가 전쟁승리와 다르다면, '전리품 챙기기'식의 낙하산 인사는 곤란하다. 또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은 시민들의 대리인이 됐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 개선장군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봉사하는 리더'가 됐을 뿐, '군림하는 리더'가 됐다는 것은 아니다. 흔히 선거결과를 놓고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는 덕담이 오가고 있는데, 맞는 말이다. 국민이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결코 '그들만의 잔치'일수 없고 '같이 나누는 잔치'여야 한다.이점을 정부·여당은 한번쯤 생각해 봤는가. 기업은 기업대로 힘들다고 하고 서민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치는데,개혁우선주의에만 몰두하면 어떻게 하나. 또 개혁의 꿈만 꿀 뿐, 현실은 지리멸렬이다. 종합부동산세 공정거래법안 등 경제현안을 둘러싸고 당과 정부, 청와대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니 종잡을 수 없다. 성장보다 배분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경제정책이 어디서 결정되고 조정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정부·여당이 백가쟁명만 활발하고 실천없이 꿈만 꾸는 '드림팀'이 돼선 곤란하다. "경제살리기가 우선"이라고 말만 하지말고 일관된 정책들을 내놓을 수 있는 '실무팀'이 돼야 한다. 그것이 대선승리와 총선승리의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