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TV드라마엔 일종의 공식이 있다. 일일극이나 주말극은 결혼을 둘러싼 양가 혹은 가족간의 갈등 끝에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고,월화 내지 수목 드라마는 깡패와 재벌 2세로 대별되는 빈부 갈등,출생의 비밀에 따른 음모,한 여자(혹은 남자)를 둘러싼 삼각관계를 버무리는 게 그것이다. 공식대로 만들면 최소한 실패는 안한다는,선험에 따른 법칙 때문인가. 공중파TV의 연속극은 히트한 드라마 구도에 등장인물과 직업만 바꿔 대입하고 그때 그때 유행하는 에피소드를 모아 짜깁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툭하면 표절 얘기가 튀어 나오는 데도 잠시 왈가왈부되다가 그대로 지나간다. 이런 가운데 작가 김수현씨(61)가 MBC를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법원이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MBC측에서 수긍할 수 없다며 항소하겠다고 했다니 두고봐야겠지만 극본 표절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김씨는 72년 첫 TV작 '무지개'를 쓴 뒤 그 동안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내사랑 누굴까' '완전한 사랑' 등 수많은 인기 드라마로 '시청률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수현표 드라마'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가부장제 대가족,권위적이지만 사려깊은 아버지,똑 부러지는 여주인공,헌신적인 남주인공,감각적이고 사실적인 대사 등."웬 개수작이야" "노인 앞에서 낡아서 버린다는 소리를 하다니 괘씸하게" 같은 게 그것이다. 소송대상이 된 '여우와 솜사탕'의 경우 이런 얼개를 그대로 답습한 데다 구체적 대사까지 일부 같다는 점에서 표절로 판정됐다고 한다. 비슷비슷한 드라마가 양산되는 상황에서 표절 여부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여우와 솜사탕'은 어쩌면 시청률을 앞세운 관행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아이디어를 빌리는 것과 구체적 표현을 베끼는 건 다르다. 지식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창의성은 발현될 수 없다. 이번 판결이 방송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표절 불감증을 치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