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파업의 계절인가. 조흥은행노조의 파업이 끝난지 엊그제인데 철도노조의 파업이 한창이다. '친노동자 정부'를 자임하고 있는 참여정부에서 이처럼 대형파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정부에서는 작년의 파업수에 미치지 못한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전국대란을 몰고 오는 파업으로 치자면 금년 파업의 강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엄청나다. 이러다가는 기업인들의 우려처럼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파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무릇 경제행위자라면 자신의 몫 챙기기에 관심을 갖고 생업에 임하게 마련이다. 피땀 흘려 일한 사람이 자신의 정당한 몫을 기대하고 요구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어야 한다(suum cuique)"는 로마의 울피아누스의 말처럼, 그것은 배분적 정의의 기초일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당한 몫'이라는 것이 딱히 정해져 있는 개념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력'에 의해서 정해질 수도 있는가 하면 '필요'에 의해서 정해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시장사회에서 노력에 의한 분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노력하는 만큼 더 많은 몫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에 의한 보상의 아킬레스건이라면 '노력 자체'에 대해 보상을 할 수는 없고 노력의 '결과'에 대해서만 보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밤샘을 거듭하며 입시공부를 한다고 하여 대학합격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시장에서 불철주야 고심끝에 신상품을 만들어 판다고 해도 소비자들이 사주지 않으면 부도가 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날개돋친 듯이 팔리는 상품에서 노력 이외에 '플러스 알파' 즉 '운'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기 어렵다. 여기서 필요에 의한 분배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기본적 욕구'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명제의 도덕적 매력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시장사회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데에는 필요에 의한 요구부분이 크다. 기본적 욕구의 해결이 시장적 교환의 상황에서 항상 충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극단적 수단인 파업을 통해 사용주나 사회에 호소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요에 의한 분배의 맹점은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자원이 충분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에티오피아 난민의 어려움은 그 도덕적 요구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점이야말로 사회구성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성과 효율성의 증대가 요구되는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필요라고 해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더 절박한 필요'가 있는가 하면 '덜 절박한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치 생필품과 사치품에 대한 선호의 차이를 상기시킨다. 직장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어엿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교통대란과 화물대란을 야기하면서 파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사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절박한 필요'로 볼 것인가. 또 "말 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말해주는 것처럼 '필요'라고 해도 방어적 차원의 이기주의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적 차원의 이기주의도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일단 파업을 하고 난 다음 협상을 하자는 전략적 사고가 팽배하고 있는데, 공세적 차원의 이기주의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철도노조는 파업을 하면서 철도공사가 돼도 공무원연금은 계속 받아야 하며 또 6조원이 넘는 고속철 부채는 정부가 인수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공무원도 아닌 철도공사원들이 국민세금으로 연금을 받겠다고 하고 부채는 국민들이 대신 나서서 갚아야 한다는 이 무리한 요구야말로 사치성 요구에 불과할지언정,기본적 필요의 요구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사회가 기본적 필요 충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회라고 해도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필요만을 들어주려 한다면,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더 절박한 필요'에 대해 불공정하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파업을 쉽게 벌이는 노조와 노조를 달래고 보자는 정부의 맹성을 촉구한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