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洸 < 한국외대 경제학 교수 / 前 복지부 장관 > 불과 1백50년 전만 해도 일본은 세계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세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였다. 그러던 일본이 명치유신 이래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그 경제적 기적에 세계가 경외심을 금치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언론은 '일본의 침몰''일본발 경제공황''3월 위기설''복합불황'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일본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다. 일본경제 문제의 핵심으로 부실채권의 처리 미흡,거품경제의 붕괴,소비심리 위축,국가채무의 누증,정치불안 등이 통상적으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외형적 현상의 피상적 관찰에 불과하다. 이러다 보니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 일본은 그 자체가 어려울 때나 잘 될 때나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돼 왔다. 우리는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들은 배우지 않고,대체로 배우지 말아야 했던 것들을 배워 왔다. 배우지 말아야 했던 것은 경제제도 및 경제정책과 관련돼 있고,꼭 배워야 했던 것들은 일본인의 기본 덕목과 관련돼 있다. 일본은 그 자체로 보나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나 기본적 덕목을 갖춘 나라이다. 일본인은 질서 지키기가 몸에 배어 있으며 남에 대한 배려도 특이하다. 노동을 정신수양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길로 보고 있으며,그 결과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일본인의 절약과 저축정신은 지나칠 정도다. 개인보다 사회를 우선시하고, 개인적인 것보다 사회전체와 관련된 것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일본에서 배우지 말아야 될 것인데도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인 것은 일본의 전시 경제체제와 이와 관련된 사고방식이다. 사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네번에 걸쳐 큰 전쟁을 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동원돼야 하고 국가가 강력히 통제했다. 2차 대전 후 일본의 고도성장은 패전 후의 개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인위적 전시 경제체제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도입한 각종 제도를 무분별하게 모방했다. 최근에 우리가 추진중인 각종 개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본에서 배운 일본의 국가간섭주의의 잔재를 털어내는 과정이다. 일본은 효율과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경쟁을 크게 제한해 왔다. 일본을 몸져눕게 만든 진정한 원인은,일본 사회에 깊이 배어 있는 경쟁과 관련된 그릇된 인식과 상관이 있다. 일본의 성공을 설명해 주는 변수로 널리 신봉돼 왔던 '다양한 방법을 통해 경쟁을 억제하는 관행들'이 실제로는 일본경제에 엄청난 폐해를 끼쳤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서양의 근대화를 모방해 따라잡는 데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이 합심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는 일본인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오늘날 일본 문제의 근원은 따라잡기 이후의 문제를 사전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잡기 위한 과정에서의 국민적 노력과 사고방식,그리고 사회체제와 따라잡기가 끝난 후 세계 인류문명을 선도하는 사고방식과 사회체제는 그 내용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주어진 전략 하에 개개의 전술을 만들어내고 그 전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새로운 전략을 창안하는 데는 부족했다. 일본인들이 전술에서는 훌륭한데 전략에서 부족한 것은 일본인들의 집단적 사고방식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세계 어느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있어서도 새로운 도약의 열쇠는 자기 변신이다. 일본인들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수많은 좋은 덕목을 고찰해 보고,일본 자신의 역사를 교훈으로 하면 일본은 변신하지 못할 가능성보다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나라다. 아직도 일본은 기회가 많다. 일본의 위기는 '관리의 위기'이지 '기본의 위기'는 아니다. 우리도 전략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함은 물론 기본의 위기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데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choik01@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