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은행 빚을 갚지 않는다"는 게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예금보험공사(예보)와 그 자회사인
한아름종금에 총 5조원 가량을 콜금리에 소폭의 가산금리를 더한 수준으로
대출, 시장금리와 4%포인트 정도의 차이가 나 연간 2천억원의 손실을 입고
있으며 만기인 오는 17일까지 제대로 돌려받을 전망도 없다고 한다.

또 작년 11월로 만기가 지난 러시아 차관에 대한 정부의 지급보증 의무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막대한 부실채권에 시달려온 은행들이 외교정책이나 종금사에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는 정부방침에 따라 빌려준 돈 때문에 손실을 입는 일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물론 예보와 한아름종금의 사정도 딱하기는 하다.

예보는 외환위기 이후 부실한 은행을 살려내는데 무려 5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데다 신규 자금조달도 여의치 않다.

공적자금은 모두 주식으로 갖고 있지만 주가가 형편없는 요즘은 매각할
수도 없는 처지다.

예금보호기금의 확충을 위해 예금보험료율을 대폭 올리려는 조치에 오히려
동정을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부실 종금사들의 처리를 위해 설립된 한아름종금도 사정이 나은 게 전혀
없으니 이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지시로 지원한 자금 때문에 은행들의 손실이
가중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자본 특수법인인 예보 및 한아름종금은 스스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는
형편이고, 이 기관의 경영과 인사는 정부가 전권을 쥐고 있으므로 그 해결책
은 마땅히 정부가 내놓아야 한다.

국내 11개 은행들은 우리나라가 구 소련과 국교를 튼 이듬해인 지난 91년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총 10억달러의 차관을 소련에 제공했으나 만기까지
돈을 못받았고 원리금은 16억5천만달러까지 불어났다.

그럼에도 은행들은 정부로부터 대지급을 못받고 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 다 은행의 부실을 정부가 조장하는 사례이다.

민간 기업과 금융기관에 투명한 경영을 요구하며 또 부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정부가 정작 은행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이처럼 등한시해도
되는지 묻고 싶다.

아마도 기업이나 은행이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면 아무리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정부는 가차없이 채찍을 휘둘렀을 것이고, 대상기관은
민.형사적 처벌은 물론이고 최소한 적색거래처 명단에 오르는 일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칙을 바로세우는 일에 정부가 솔선수범을 보이기 바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