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일 <동방그룹 종합기획실장>

깊은 회한과 아쉬움을 남긴채 병자년 한해가 저물어간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보니 온통 우울한 기억뿐이다.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만이 남는다.

아쉬운 마음에 "시간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부질없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 올해처럼 기업을 경영하기가 어려운 때도 없었다.

경제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돼 갔고 기업들은 제살을 베어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사회정의와 역사의 재조명을 위해 연초부터 몰아닥친 정치적 풍파는
기업의 도덕성에 가차없는 "채찍"을 가했다.

또 경기침체의 한파가 하반기부터 몰아치기 시작하면서 "토사구팽"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수출은 줄어들었고 내수시장은 끝도 없는 침체로 빠져 들었다.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 선진국 대열의 OECD가입은 저성장 고물가
앞에서 빛을 잃었다.

경제주체들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중심을 잃었다.

그 누구도 명쾌한 해법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사방을 살펴봐도 기업을 위한 "당근"은 어디에도 없었다.

돌이켜 보건데 그동안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내혹한 무한경쟁시대의
흐름을 체감하지 못한채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으며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단지 "경제전쟁 시대"라는 예고만 가득했을 뿐 "무기"는 만들지 못했다.

이제 우리앞에는 혹독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상실"은 곧 "기회"라는 것이다.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걸작 "프랑스 혁명사"를 쓴 토마스 칼라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자신의 원고가 불타버리는 아픔을 겪는다.

절망감에 휩싸인 칼라일은 어느날 한 석공이 작은 벽돌을 쌓아서 높고
긴 벽을 만드는 것을 목격하고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칼라일은 재집필에 몰두, 자신의 최대 역작인 "프랑스 혁명사"를 새롭게
탄생시킨다.

96년 병자년 한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현실모면의 "당근"이 아니다.

수천페이지의 원고를 다시 써내려갈 수 있었던 칼라일의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환경에도 흔들이지 않는 현실의 깨우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한숨과 체념이 난무한 현실의 책임을 환경탓으로만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곰곰 반추해 보아야 한다.

이제 97년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다.

새로운 시작의 끝이 "흘러간 시간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탓하는 후회와
아쉬움으로 장식돼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