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이 종합경제지로서는 처음으로 2일 지령 1만호를 기록했다.

지난 64년 10월12일 창간호를 낸지 30년6개월만이다.

우리경제가 가난의 굴레를 벗고 오늘의 풍요를 이루기까지 충실한 안내자,
강력한 후원자로서 고락을 같이 해온 셈이다.

그동안 발행된 1만호까지의 신문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는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

숨가쁘게 달려온 개발연대의 산업현장들이 숨김없이 활자에 담겨져 있다.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창간 당시의 사설은 "자립과 번영을 위해 민족
역량을 총결집하자"고 호소해 개발의지에 불을 붙였다.

"쌀값이 떨어진다"고 걱정하던 출범초기의 머릿기사는 "공단시대개막"
"자동차 처녀수출"을 거쳐 "세계화경영"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생산과 수출의 현장을 한국경제신문이 더불어 뛰며 증언하고 기록하고
안내해 온 것이다.

혼신의 힘을 쏟은 기업인과 근로자들의 정열에 박수를 보내고 관료집단의
숨은 노력에 칭찬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뻗어가는 지구촌 구석구석엔 특파원들이 파견됐고 이들이 송고
하는 기사들은 미개척지를 뛰는 또다른 기업가들에게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출범당시 4개면으로 충분했던 하루 지면이 이제는 40개면으로도 모자라는
정보화시대를 맞았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정상의 종합경제지로 성장해올수 있었던 것은 독자들
의 사랑과 성원덕택이었음을 명심하면서 새로운 봉사를 다짐해 본다.

언론의 역할은 막중한 것이고 더욱이 경제신문의 그것은 치열한 경제전쟁의
시대에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정치과잉의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몸살을 앓을 때도 한국경제신문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경제신문의 바른길을 지켜왔다.

우리경제나 한국경제신문 모두가 고난의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난 결과는 "선진경제의 구축"과 "긍지의 1만호"라고해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로스토교수가 경제발전 단계론을 쓰고 백악관 경제고문 자격으로 6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만해도 개발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었다.

그것이 현실로 구체화되는 과정에는 "산업현장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한국경제신문의 역할과 기능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일본경제의 오늘을 명치25년에 창간된 일본경제신문 1세기역사가 견인해
왔고 100여년의 월스트리트 저널이 미국경제를 지켜왔다.

한국경제의 개발 30년역사에서 한국경제신문의 역할이 무엇이었던가를
자문해 보면서 새롭게 펼쳐질 21세기의 선도적 기능을 다짐해 본다.

기업과 정부를 잇고 기업과 기업을 연결하며 경영자와 근로자, 산업계와
학계를 맺어가는 정보와 여론의 가교역할은 우리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에
해당한다.

한국언론계에 전자신문의 첫장을 연것이나 컴퓨터 편집의 영역을 처녀개척
해 나간 것등은 급격한 신문산업의 변화에 비춰보면 이젠 우리의 작은
속내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젠 국력을 키우고 국민생활을 풍요롭게 살찌워야 하는 보다 큰 미래개척
의 사명이 주어져 있다.

새롭게 만들어 갈 또다른 1만호는 우리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가져다 주는
사회 중심축 역할을 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21세기를 맞는 우리경제의 과제는 세계화경제구조의 구축과 통일시대에
대비한 민족경제공동체를 다져가는 일이다.

정보화 시대를 슬기롭게 익혀갈 수 있는 민간기업의 후원자로서, 가정생활
을 살찌우는 안내자로서, 정책입안의 조언자로서 종합경제지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개척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한국경제신문은 "민주시장경제의 창달"을 사시로 하고 있다.

민간의 창의를 최대한 발현시키는 경제체제의 정착과 선진복지사회의 건설
을 돕는 일이다.

이정신이 취재 편집 제작에 일관되게 적용돼왔다.

부단한 자기노력, 겸허하고도 공정한 취재보도, 정보의 양과 질에서 세계의
신문들과 겨루는 명실공히 한국경제 발전의 중심축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 정규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