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은 장차 대들보에 목을 맬 여자의 운명을 생각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옥은 그 여인이 영국부나 녕국부의 정실 부인들 중 하나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 기분이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체통 있는 가문의 부인들 중에서 시아버지와 사련을 맺을 여자가 나올
것이라니.

"시구절에서 자주 나오는 정이라는 말과 진이라는 말이 발음이 비슷
하잖아요? 그래서." 습인이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그만,그만 하라니까! 우리 가문하고는 상관이 없는 여자의 운명일
거야. 금릉성에서 빼어난 여자 열두명이 우리 가문에 다 몰려 있는
것도 아닐테고"

보옥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진이라는 말과 관련되는 연상작용을 스스로
끊어내었다.

"알겠어요.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래 박명사에서 우부책,부책,
정책들을 보고 나서는 어디로 갔나요?"

습인이 보옥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기 위해 외람되지만 손을 뻗어 보옥의
가슴께를 쓸어주었다.

보옥은 깊은 숨을 한번 쉬고 나서 태허환경에서 겪은 일들을 습인에게
계속 들려주었다.

"그 금릉 십이채 정책을 내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경환 선녀가
그 책의 비밀들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는지 슬며시 다가와 손으로 책을
덮는 거야.

그리고는 우리 좋은 데로 구경갑시다 하며 나를 데려가는 거야. 나도
수수께끼 같은 답답한 그림이나 시구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다른 구경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흔쾌히 경환 선녀를 따라갔지.

안으로 좀 더 들어가니 금으로 마루를 깔고 옥돌로 기둥을 세우고 주옥
으로 창문을 만든 화려한 궁전이 나타나더군. 내가 그 궁전에 홀려서
멍하니 서 있으니 경환 선녀가 귀한 손님 모시라고 소리치며 선녀들을
불러 모으는 거야.

그러자 선녀들이 소매를 어깨에 척 걸치고 날개옷을 펄럭이며 우르르
몰려나왔는데,교태롭기가 화사한 봄꽃 같고 어여쁘기가 둥근 가을달
같더군"

"선녀들이 그렇게 아름다워요?"

습인이 선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리 아름다운 선녀들도 마음씨는 별로 그렇지 않더군"

보옥이 무슨 씁쓸한 기억이 있는 듯 아랫입술을 이빨로 한번 물었다.

"그럴 리가. 선녀들은 마음씨도 착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을텐데"

"나도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도 마. 우리 인간이랑 똑같애"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