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진씨가 보옥을 자기 방으로 들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보옥이 꾸벅꾸벅 졸자, 보옥의 할머니 사부인이 사람들에게 보옥을
데려다 한잠 푹 재우고 오라고 하였다.

그때 진씨가 선뜻 나서 보옥의 유모와 시녀들에게 보옥을 데리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며 안내를 자청하였다.

사부인은 진씨가 착실하고 아름답고 온화하여 집안 며느리들중에서
남달리 귀여워하고 있던 터라, 진씨가 보옥을 재우고 오겠다고 하자
그녀를 믿고 그녀가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진씨는 보옥과 사람들을 데리고 안채의 어느 침실로 들어갔다.

보옥이 머리를 들어보니 위쪽 벽에 한폭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속의 인물이 멋있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바로 "연려도"가 아닌가.

보옥은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따져보기도 전에 불쾌한 생각부터
들었다.

그 그림은 한나라 학자 유향을 본받아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명아주 지팡이 끝에 불을 붙여 유향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는 허연
백발의 노인은 신선인지도 몰랐다.

그 그림 양옆에는 대련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세상일에 밝은 것은 학문의 덕이요, 인정에 통달하는 것은 문장의
힘이라"

보옥은 학문이니 문장이니 하는 말들만 들어도 골치가 아플 지경
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방이라 하더라도 더이상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았다.

"이 방에서 나가고 싶어요, 나가요"

보옥이 칭얼거리자 진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방이 싫으면 저 방으로 갈까요? 아니면 제방으로 가서 주무
시든지"

보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유모가 말렸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아저씨뻘이 되는데 어찌 조카 며느님의 방에
들어가 주무실 수 있어요?"

그러나 진씨는 어린 남동생보다 더 자그마한 보옥이 자기 방에서 좀
자면 어떠냐고 유모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진씨의 방으로 들어선 보옥은 방안에 가득한 향내에 취하여 기분이
몽롱해지면서 뼈가 녹는듯하였다.

벽에 걸린 그림도 "연려도" 같은 딱딱한 그림이 아니라 아리따운
여인이 봄날 해당화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당백호의 "해당춘수도"
였다.

"아, 향기롭구나. 이 방이 좋아. 여기서는 신선이라도 만나겠구나"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