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한 < 시민교통환경연구소 소장 >

지난해 프랑스에서 가난한 유학시절을 보내고 돌아온 방송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제험한 그곳의 교통문화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우선, 프랑스에서는 안전운행에 대한 광고캠페인이라든가 질서를 지키라는
광고문을 찾아보기 어렵다한다.

또 횡난보도에서는 신호등이 큰 의미가 없고 보행자가 자신의 권리만을
고집하여 건너가도 운전자들은 당연히 정지할 정도로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하는 문화가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차조심이 아니라 사람조심하는 나라가 프랑스이다.

우리는 어떤가 보행자가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도 좌우로
실피면서 화살표시에 따라 우측으로 통행해야 할 정도로 살벌하다.

주택가 생활도로는 주차와 자동차통행공간으로 변해 벼려 다른생활기능은
고사하고 보행공간기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이러한 양상은 자동차가 달리는 차도에서도 그대로 연장된다.

운전대만 잡으면 자동차 속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자동차로만 물신화되어
나타나 생명을 위협하는 위반의 곡예운전을 시작한다.

사소한 접촉사고만 나도 차량이 밀리든 말든 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시비가
붙는다.

우리의 자동차와 도로에는 사람이 없다.

간혹 횡단보도를 건너려 할때 차를 세우고 건너가라고 손짓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 결과 한해 1만여명씩 목숨을 잃고 그중 절반 가까이가 보행자들이다.

소중한 아이들도 2주일마다 한학급씩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다.

인간성을 상실한 뺑소니사고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참으로 기인한 일는 다리가 무너지고 가스사고가 터지면 온나라가 발칵
되집어지는데 이처럼 많은 생명이 죽고 다치는데도 조용하다는 시실이다.

과연 우리에게 자동차와 도로란 무엇인가 반문하지 않을수 없다.

교통선진국의 척도는 결코 자동차보유대수와 도로연장길이가 아니다.

그것은 자동차가 갖는 위험성과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사람과 공존할수 있는
질서와 의식이 어느정도로 구축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때, 우리나라는 그냥 운전하는 것이외 별다른 의식과
문화가 없이 저동차만 늘어나는 교통후진국이다.

프랑스가 우리와 다른 차이를 가진다면 바로 보차공존의 교통질서와 문화
의식이 그들의 자동차교통을 튼튼하게 떠바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운전에도 인격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격은 운전솜씨를 뜻하는게 아니다.

남을 생각하고 사람조심하는 마음씨이다.

이 마음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이웃과 더불어 공동테적 삶을 살아가는
주거생활지역의 생활도로이다.

이 곳에서 운전자는 이옷인 보행자를 존중하고 사람조심하는 운전태도를
익히고 운전인격을 쌓아 나간다.

그래서 생활도로에서 교통질서가 엉망일때 간선도로는 말할 나위가 없다.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 보행자를 무시하는 운전자가 자동차를
존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자동차대중화사회를 맞아 우리는 보차공존의 교통문화를 실현해
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로여건에 비추어 이러한 과제가 쉽게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유럽등은 마차교통 시대를 거치면서 보도와 차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고 운전자들의 보행자 주의의무도 오랜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지만, 우리는
간선도로망 이외에 전체 도로체계에 대한 정비 없이 곧바로 자동차대중화
단계로 넘어 왔다.

또한 유럽도시들이 1세기에 걸쳐 적응해온 시간적 여유도 없다.

유일한 길은 운전자 한사람 한사람이 질서를 만들어갈려는 노력과 인내를
가지는 것이다.

횡단보도와 주택가 생활도로에서는 보행자가 당연히 통행우선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천하자.

이러한 작은 실천이 쌓이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규제가 체화되
생활화된다면 당대 사회에 보/차공존의 문화가 꽃필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