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사내 '경조사 게시판'이 돈줄…깐깐한 와이프도 지갑 열어
과거 비자금(秘資金)은 권력자들이 권력과 품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조선 세 번째 임금 태종이 관료의 우두머리였던 정도전과 갈등을 빚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도 ‘내탕금(왕실 비자금)의 국고 환수 여부’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반대하는 신하들로부터 당당하기 위해 관련 비용을 내탕금으로 충당했다. 가깝게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한 원인 중 하나가 ‘장성택 비자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단 분석도 나온다.

고금의 권력자들뿐 아니라 이 시대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김과장 이대리들에게도 비자금은 품위 유지를 위한 ‘마지막 보루’다. 비자금이 떨어지면 회사 후배들에게 술 한 잔 화끈하게 못 사는 ‘모양 빠지는’ 선배가 되기 십상이다. 비밀이 없어야 하는 부부 사이에 비자금을 숨기거나 찾아내기 위해 피말리는 수 싸움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자금 조성의 시작은 결혼식


오는 5월17일 결혼을 앞둔 자동차 부품회사 이모 과장이 최근 기혼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충고(?)는 “비자금은 결혼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라는 것. 이 말에 수긍은 가지만 문제는 이 과장의 사정이 녹록지 않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전세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비자금은커녕 1억원대 전세자금대출을 받아야 할 판이다.

그러던 중 이 과장은 친구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조언을 들었다. 학교 동창이나 회사 동기 등 친한 사람들에게 “축의금을 축의금함에 넣지 말고 직접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다. 친한 지인 20명에게만 축의금을 직접 받아도 100만원 이상의 비자금 종잣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친구들한테 이왕 축의금을 줄 거면 5만원 지폐로 한 봉투에 모아 각자의 이름을 써서 달라고 부탁했죠. 부모님과 예비 신부에겐 미안하지만 기혼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니 비자금은 꼭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김모 선생님(여)은 다음달 결혼을 앞두고 한 지방은행에 ‘다이렉트’ 수시입출금식 통장을 개설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가전제품 구매비용으로 1000만원가량을 받았는데 예비 신랑이 이미 웬만한 가전제품을 갖추고 있어서다. 김치 냉장고와 커피 로스터 등 필요한 것을 사고도 700만원 정도 남았다. “과거엔 주로 아내가 경제권을 가졌지만 요즘엔 맞벌이가 늘면서 경제관념이 있는 쪽이 가계지출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경제권을 남편이 가져갈 수도 있는데, 제 통장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성은 경조사, 여성은 쇼핑

한 중견 출판사의 송모 과장은 200만원대 비자금을 손쉽게 마련했다. 그가 적지 않은 비자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사내 경조사’ 덕분이다. 송 과장 회사의 인터넷 게시판엔 임직원 경조사가 올라온다. 송 과장의 주요 일과 중 하나는 경조사 게시판을 체크하는 것.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송 과장 역시 친분이 있는 사람의 경조사에만 참석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에게 송 과장은 회사 최고의 ‘마당발’이다. 경조사가 뜰 때마다 일부러 ‘사내 게시판’을 보여주며 “친한 동료라서 안 갈 수도 없고, 돈 좀 부탁해”라며 5만~10만원씩 받아내서다. 송 과장은 “남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조사를 잘 챙겨야 한다는 것은 아내도 이해하기 때문에 비자금을 마련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에 비해 여성 직장인들이 비자금 조성에 애용하는 수단은 방문판매 화장품 구매 등 쇼핑이다. 판매사원들에게 요청하면 30만원짜리 화장품 세트를 신용카드로 결제해준 뒤 할인된 금액을 현금으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대기업 7년차 ‘워킹맘’인 안모 과장은 “자주하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소액씩 가끔하는 게 요령”이라며 “이렇게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귀띔했다.

중견 패션회사에 다니는 유모 대리는 가계살림을 전담하고 있지만 남편이 가계부를 꼼꼼히 챙겨보기 때문에 비자금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세일 수법’이다. 아울렛에서 70% 세일할 때 현금을 주고 옷을 산 다음 백화점에서 50% 할인받아 샀다고 얘기하는 식이다. 유 대리는 “남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사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해야 효과가 가장 좋다”며 “단 세일 기간과 품목을 미리 파악해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고 장터는 ‘비자금 샘물’

중고 거래 사이트는 이미 유부남들의 비자금 조성 창구가 된 지 오래다. 한때 유명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선 비자금 조성을 놓고 오간 문자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5만원을 주고 중고품을 사기로 한 구매자가 “계좌번호를 알려 주시면 입금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판매자가 “만나서 현금으로 직접 주시면 안되나요? 와이프 몰래 비상금 만드는 거라서요”라고 답한 것. 이에 구매자가 “앗, 사실 저도 부탁이 있는데요. 와이프가 동행할 것 같은데 가격을 25만원으로 알고 있어서…. 차익은 나중에 돌려주세요”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대기업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 역시 고가의 카메라 장비, 자동차 용품, 회사에서 경품에 당첨돼 받은 아이패드, 방구석에 처박아둔 MP3 등을 팔아 비자금을 만들고 있다. 주도면밀한 와이프의 ‘불시 계좌 검문’을 피하기 위해 돈은 주로 구매자를 직접 만나 현금으로 받는다. 김 대리는 “정말 귀찮긴 하지만 증거를 없애기 위해선 어쩔 수 없잖아요?”

비자금 걸리면 안 만드니만 못해

국내 전자회사의 박모 대리는 월급 통장을 은행 통장에서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바꿔 놨다. 와이프가 은행에 대해선 잘 알지만 증권에 대해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용한 것. 와이프에겐 “하루만 맡겨도 이자가 붙으니 얼마나 좋냐”며 CMA 월급 통장의 필요성을 역설해놨다. 성과급이나 연차수당 등의 돈이 함께 들어오면 그중 일부만 월급과 함께 와이프 계좌로 보내고 나머지는 비자금으로 활용하는 식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박 대리의 와이프는 어느 날 동창 모임에서 ‘증권 계좌를 통해 비자금을 만든 친구 남편’의 얘기를 듣고선 박 대리에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CMA 계좌 공인인증서를 알려달라”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비밀번호를 알려준 박 대리. “CMA 통장이고 뭐고 와이프가 정해 놓은 은행 통장으로 바뀌었죠. 용돈은 절반으로 깎였고요. 도둑놈이라고 욕먹었습니다.”

황정수/전예진/박한신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