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역동경제’ 실현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100여 건의 규제 완화 및 감세 관련 법안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지난 1월 9일 국회에서 정부가 킬러규제로 지목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과 화학물질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한경DB
정부가 ‘역동경제’ 실현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100여 건의 규제 완화 및 감세 관련 법안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지난 1월 9일 국회에서 정부가 킬러규제로 지목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과 화학물질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한경DB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지난 1월 4일 열린 제1차 민생토론회. 기획재정부는 올해 역점 추진하는 핵심 과제를 담은 ‘2024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조속한 경기 부양을 위해 1분기에 주요 입법 과제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조세특례제한법·소득세법 개정안 등 정부가 제출한 7개 핵심 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 소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열린 총 24회의 민생토론회 때 발표한 60여 개 핵심 과제의 상당수는 국회에 개정 법률안조차 제출되지 않았다. 경제·민생과제 입법을 외면한 야당뿐 아니라 정부·여당도 정책과제가 무산된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여당도 외면한 킬러규제

윤 대통령은 작년 8월 열린 규제혁신전략회의에서 투자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킬러규제’로 여섯 가지를 꼽았다. 화학물질 등록 기준을 완화하는 화평법·화관법 개정안, 외국인고용법 개정안, 산업단지 규제를 완화하는 산업집적법·산업입지법 개정안, 환경영향평가를 간소화하는 환경영향평가법 개정안이다. 당시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 6단체도 공동성명을 내고 6개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했다.
경제·민생법안 허송세월…전투력 상실한 정부에 '정책 불신' 쌓여
작년 말 통과된 산업집적법에 이어 화평법·화관법과 환경영향평가법은 올초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산업입지법과 외국인고용법 등 2건은 소관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산업입지법은 노후화된 산업단지의 업종 변경 및 토지용도 전환 등 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작년 9월 발의됐다. 외국인고용법은 유학비자(D2)를 발급받은 외국인 학생이 근로자로 취업할 수 있도록 E9 비자 발급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2건의 킬러규제를 비롯해 정부와 여당이 2022년 5월 이후 국회에 제출한 223건의 규제혁신 법안 중 98건은 올 들어 4월까지 ‘총선 정국’이 이어지면서 상임위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기재부가 지난 2월 국회에 제출한 올해 핵심 민생과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노후차 개별소비세 감면, 전통시장 소비 공제율 상향 등 여야 이견이 작은 법안마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쟁점 법안과 엮여 일절 논의되지 못했다.

국민 혼선만 가중한 정책 발표

정부·여당은 거대 야당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실제로 정부가 킬러규제와 함께 1호 규제혁신 법안으로 추진한 유통산업발전법은 야당 반발로 소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주요 대형마트 영업휴무일에 온라인 배송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골목상권 타격이 크다는 야당 반발에 부딪혔다. 윤 대통령이 역점 법안으로 추진한 금투세 폐지 논의도 국회에서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야당은 양곡관리법(제2 양곡관리법),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농안법) 및 가맹사업거래공정화법 개정안 등은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 잇따라 직회부했다. 야당이 과반 의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29일 열리는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개정안은 무난히 통과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일부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당정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란 지적을 내놓고 있다. 예컨대 킬러규제 법안인 산업입지법과 외국인고용법은 야당도 적극 반대하지 않았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는 “외국인고용법 개정안은 야당이 반대하는 법안은 아니지만 다른 쟁점 사안에 묻혀 추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통시장 소비 공제율 상향 등 민생법안도 총선을 앞두고 여당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시행령이나 고시 등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하위법령을 중심으로 경제활성화 대책을 지속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가 민생토론회 등을 통해 국민에게 약속한 주요 정책 입법과제가 무산된 책임을 일방적으로 야당에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경민/박상용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