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밀어낸 디지털 지도…어디까지 진화할까
2008년 제주도 여행 때의 일이다. 밤바다를 볼 요량으로 차에 올라타 숙소에서 몇 떨어진 해수욕장의 이름을 내비게이션 단말기에 입력했다. 마침 ‘△△해수욕장 백사장’이란 주소가 나타나 목적지로 설정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자 내비게이션의 화살표는 웬 골목길을 향했다. 가로등도 없이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길을 수백미터 통과하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문제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더 이상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살펴보니 3쯤 돼보이는 축대 위에 서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더 밟았더라면 밑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축대 아래는 목적지인 백사장이었다. 내비는 단어 그대로 백사장까지 가는 최단 거리를 알려줬던 셈이다.

◆아날로그 지도 무력화시키는 내비

종이 밀어낸 디지털 지도…어디까지 진화할까
이런 극단적(?)인 수준의 경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 운전자라면 내비가 엉뚱한 길을 알려줘 길을 헤매는 등 좋지 않은 기억을 한두 가지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비는 편의성 덕에 운전을 하는 사람에게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도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사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스마트폰에서 작동하는 지도 앱(응용프로그램)과 내장된 GPS(위성 위치 확인시스템)를 연계하면 지도는 물론 현재 위치와 목적지의 방향, 이동 방법 등을 알아낼 수 있다. 길을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스마트폰부터 꺼내 목적지를 찾게 된다.

일반적인 종이 지도를 읽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현재 나의 위치를 지도와 맞춰보는 일이다. 방향과 주변의 건물, 도로 번호 등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를 종합하는 능력이 필요한 고도의 작업이다. 하지만 내비나 스마트폰 모두 별다른 수고 없이도 내 위치를 알려주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힘들게 지도를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최첨단 내비게이션도, GPS도 모두 기본은 아날로그 지도다. 지도는 현실을 간략하게 묘사한 ‘요약본’이다. 원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3등분해 묘사한 중세 서유럽의 ‘TO 지도’처럼 과한 요약도 있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지도는 필요한 정보를 적당히 취사선택해 압축해서 보여준다. 운전할 때 보는 지도는 도로와 휴게소, 주유소 등을 중점적으로 그려넣고 지적도(地籍圖)에선 필지에 따라 나눠진 구역들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축척도 달라진다. 세계 전도는 보통 3000만 대 1을 넘어가는 반면 한 동네만을 담은 지도는 5만 대 1로도 표시할 수 있다. 같은 구역에 대한 지도를 만들더라도 용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셈이다.

◆현실 그대로 복제한 3차원 지도 나올까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지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의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수록된 ‘과학적 정확성에 관하여’란 짧은 글을 통해 실물과 동일한 지도에 대한 상상을 펼쳤다. 보르헤스는 “제국의 지도학은 너무 완벽해 (…) 제국의 지도는 한 지방의 크기에 달했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는 지도에도 만족하지 못한 지도 제작 길드는 정확히 제국의 크기만한 제국전도를 만들었는데, 그 안의 모든 세부는 현실의 지점에 대응했다. 지도학에 별 관심이 없었던 후세대는 이 방대한 지도가 쓸모없음을 깨닫고, 불손하게 그것을 태양과 겨울의 혹독함에 내맡겨버렸다”고 썼다. 하긴 현실과 똑같은 크기의 지도라면 땅 위에 그대로 얹어놓아야 할테니 쓸모가 없을 만도 하다.

보르헤스가 저 글을 썼던 것이 1930년대였으니 1 대 1 비율의 지도는 말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현실과 동일한 사이즈의 지도를 만드는 일도 가능케 만들었다. 지금은 종이와 같은 물리적인 매체가 아닌 데이터로 지도를 만들고 이를 언제 어느 곳에서든 펼쳐볼 수 있다. 구글을 비롯한 많은 회사들은 전통적인 모습의 평면도뿐 아니라 거리에서 바라본 모습도 제공하고 있다. 어떤 업체는 거리의 모습을 넘어 건물 내부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게 했다. 머지않아 현실을 그대로 복제한 3차원 지도까지도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쯤 되면 지도가 현실인지 현실이 지도인지조차 헛갈릴 지경이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