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을 전후해 몇가지 용무로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엘 다녀왔다.
이 두도시에서 해장국으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맛이 한국에서
먹는 것과 진배없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십만명의 동포가 거주하고 있는데다 방문객 또한 엄청난 현실을
생각해보면 당영한 현상이리라. 뉴욕등 미국의 다른 도시를 제외하고도
대한항공여객기가 하루에 4~5편 이상 한국과 LA 또는 하와이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미국에 진출한 한국인의 힘을 상징하고 있는 한국식 해장국을
먹으며 나는 22년전 우리 민항 역사상 처음으로 이 두도시에 여객기를 취항
시킬 때 많은 동포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눈시울까지 적시며 환영하던
장면을 떠올리고 감회에 젖었다.

그토록 바라던 태평양 횡단노선을 개설한 71년4월 화물기 취항초기의
영업은 고전이었다. 아직 국내 하주들의 민항에 대한 인식도가 낮은
데다가 정책적인 배려도 없었던데에 주된 이유다.

자국 민항공의 발전을 위하여 국민들이 자국기를 애용하도록 정책적으로
권장하고 보호하는 것이 세계 각국의 일반적인 추세였으나 당시 우리나라는
민항공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낮아 정부 차원의 배려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런 여건속에서 취항 초기 대한항공 영업직원들이 고객확보를 위해
기울인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수요처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복덕방까지 찾아다니며 어렵사리 알아낸 수출업체에 접근하더라도 일부
업체를 제외하고는 우리 항공사에 신뢰를 주지 않았다. 이러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주들과 힘겨운 설득전까지 치러야 했다.

당시 외국의 비즈니스 맨들이 주로 이용하던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숙박부를 뒤져 가며 직접 접촉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주노선 개설 첫해에는 적자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적자는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었다. 주위의 회의적인
시각에 아랑곳없이 나는 적자 감수의 각오와 점차적인 개선 전망에 대한
신념을 밝히며 여러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적극적인 판촉 활동을 벌이도록
했다. "고통의 각오"그것은 창업주의 몫이었다.

그결과 마침내 국내업계에서 대한항공을 바라보는 시각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도 또한 점차로 신뢰가 쌓여가면서
대한항공의 시장점유율은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이렇게 1년여동안 화물기 운항을 통해 경험을 축적한 후인 이듬해(1972년)
서울~도쿄~호놀룰루~LA노선에 정기여객기를 취항시키게 됐다.

도쿄를 경유하여 미주로 가는 이원권을 확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으로서는 서울을 경유하여 제3국으로가는 이원권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
었지만 우리로서는 도쿄이원권획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평소부터 가깝게 지내던 일본의 재계와 정치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당국자들을 설득한 끝에 힘겹게 이원권을 따낼수 있었다.

지금은 다들 당연한 "길"로 알고있지만 당시 도쿄를 경유하는 이원권
확보는 우리 항고노선망 구성에 있어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바로 새로 길을 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태극마크를 빛내며 "우리의 날개"가 마침내 호놀룰루에 첫 착륙을 하던날,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의 열광적인 환영장면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일제 치하에서 정든 고향을 떠나 이억만리 타국에서 가슴에 한을 안고
살아온 우리 동포들에게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한풀이의 한마당이었다.
조국의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실감이었고,나아가 조국이 보다 가까이
있음을 몸으로 느낄수 있는 계기였던 것이다. 어떤이는 심지어 "하늘의
천사"라는 얘기까지 했다.

목적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날개 그 장한
모습을 보러나온 수많은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을 해준일도 감격
적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환영인파를 잊지 못해 이따금 떠올리곤 한다.
우리 국기를 단 국적 항공사란 해외의 동포들에게 바로 그렇게 특별한 의미
가 있는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