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권재판소, 스위스 노인들 제기한 소송서 승소 판결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책임 인정한 첫 국제 법원 판결
유럽최고법원 "스위스, 온실가스 대응 부족으로 인권침해"(종합)
스위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아 고령자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유럽 최고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각국에서 환경 운동가들이 기후변화와 관련한 소송을 내 이긴 적은 있지만 국제 법원에서 특정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인권재판소(ECHR)는 9일(현지시간)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 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소속 회원들이 스위스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측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이에 따라 스위스 정부가 이 단체에 3개월 이내에 8만 유로(약 1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64세 이상의 스위스 여성 약 2천400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스위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지 않아 자신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2020년 유럽인권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기후 변화엔 모든 스위스인이 영향받지만 특히 자신들과 같은 노인 여성이 가장 취약하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실제 지난해 한 연구에 따르면 2022년 여름 폭염으로 유럽 전역에서 6만1천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 가운데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여성으로 집계됐다.

애초 이 단체는 2016년 스위스 법원에 처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스위스 대법원은 노인 여성의 권리가 침해됐다는 점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단체는 스위스 법원이 사건을 제대로 심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유럽인권재판소에 사건을 들고 갔다.

단체는 스위스 정부가 지구 온난화를 섭씨 2도까지 막을 수 있을 만큼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은 것이 유럽인권조약상 생명권과 자율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유럽최고법원 "스위스, 온실가스 대응 부족으로 인권침해"(종합)
사안을 심리한 유럽인권재판소 재판부는 스위스 정부가 유럽인권조약 제8조 '사생활 및 가정생활을 존중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우선 협약 8조에 '기후 변화가 생명, 건강, 복지 및 삶의 질에 미치는 심각한 악영향에서 국가 당국의 효과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포함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제출된 자료들을 볼 때 스위스 정부는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입법이나 필요 조치를 제때 적절한 방식으로 취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또 "스위스 당국이 탄소 예산이나 국가 온실가스 배출 한도를 책정하는 데 실패하는 등 관련 국내 규제 체계를 마련하는 과정에 중대한 공백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과거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유럽인권조약 제6조 1항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당했다고 판단했다.

앞서 스위스 법원이 원고들의 청구 사유를 기각하면서 그에 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스위스 법원은 기후 변화에 관한 설득력 있는 과학적 증거를 고려하지 않았고 원고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럽최고법원 "스위스, 온실가스 대응 부족으로 인권침해"(종합)
이날 판결에 비올라 암헤르트 스위스 대통령은 "판결문을 읽고 분석하기 전까진 자세히 언급할 수 없다"면서도 "스위스는 판결과 상관없이 지속 가능성과 생물 다양성, 탄소 중립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포르투갈 청소년 6명과 프랑스의 한 전직 시장이 제기한 유사한 소송은 모두 각하했다.

포르투갈 청소년 6명은 32개 유럽 정부가 지구 온난화에 충분히 대처하지 못해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소는 그러나 이들이 포르투갈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관할권이 성립하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이들이 포르투갈에서 법적 다툼을 하지 않고 곧바로 유럽인권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만큼 포르투갈 정부를 상대로 한 청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봤다.

재판소는 프랑스 전직 시장이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 역시 그가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피해자 지위를 인정할 수 없어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