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 공격 4년새 10배 늘었다…기업 'G의 비용' 눈덩이
의결권 행사 관련 자문을 해주는 세계 3대 SID(주주판명조사) 업체 머로우소달리는 올 주주총회 시즌 때 쉴 틈 없이 바빴다. 행동주의 펀드의 잇따른 공격 때문이다. 머로우소달리에 주총 캠페인 자문을 맡긴 상장사는 삼성물산, 포스코홀딩스, KT&G 등 16곳에 달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한 축인 ‘G(거버넌스)’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들의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최근 행동주의 펀드인 트라이언파트너스와의 주총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4000만달러(약 540억원)를 쓴 디즈니 같은 사례가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다.

대형 사모펀드도 ‘눈독’

한국 기업들은 최근 몇 년 사이 행동주의 펀드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7일 한국경제인협회의 ‘주주행동주의 부상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행동주의 펀드 공격을 받은 기업이 세 번째로 많았다. 2019년 8곳에서 지난해 77곳으로 크게 늘었다.

대형 사모펀드(PEF) 운용사들도 ‘스페셜 시추에이션(SS)’ 투자를 내세워 행동주의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MBK파트너스의 한국앤컴퍼니 공개매수 시도, 한미사이언스 경영권 분쟁에 뛰어든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사례도 주주를 대변해 지분 가치를 띄우려 했다는 점에서 행동주의로 볼 수 있다”고 했다. MBK 같은 대형 PEF가 행동주의 시장에 뛰어들면 국내외 연기금 자금의 유입에도 물꼬가 틀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연기금이 본격적으로 행동주의 펀드에 돈을 대는 순간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기업의 방어를 돕는 자문사들도 호황을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방어에 500억원 쓴 디즈니

올 주총 시즌은 디즈니의 사례가 남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플래시라이트캐피털매니지먼트(FCP)와 2022년부터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KT&G만 해도 방어 전략을 짜기 위해 머로우소달리를 비롯해 골드만삭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김앤장 등을 고용했다. 200억원 안팎을 썼을 것이란 추정이 IB업계에서 나온다. SM엔터는 지난해 주총에서 소액주주의 표심을 잡기 위해 SID 업체만 7곳을 고용했다. 20억원가량의 비용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형 행동주의 펀드들의 전략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점도 방어 비용을 늘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FCP는 KT&G에 공세를 펴기 전 100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하고, 소액주주를 설득하기 위한 유튜브를 제작하는 등 미국형 행동주의 펀드의 전략을 구사했다.

전략 따라 행동주의 성적 ‘희비’

올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성적표는 구사한 전략에 따라 명확히 갈렸다. 장기적인 지배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곳은 성과를 냈고,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 등 단기 주가 부양에 집중한 곳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대표적인 곳이 삼성물산이었다. 한국계 안다자산운용을 비롯해 영국계 시티오브런던, 미국계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 등 5개 행동주의 펀드가 연합해 ‘울프 팩’(늑대 무리) 전략을 폈지만 완패했다. 보통주 주당 4500원, 우선주 주당 4550원 배당과 500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을 요구했는데 찬성률이 각각 23%, 18%에 그쳤다. 소액주주들은 “이들이 요구하는 주주환원 규모가 올해 잉여현금흐름보다 많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없다”는 회사 측 논리를 받아들였다.

반면 지배구조 개편 등 지속 가능한 주주가치를 강조한 트러스톤은 성과를 냈다. 태광산업에 추천한 사내·사외이사 모두 이사회에 진입했다. BYC에선 회사가 주총 직전 트러스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액면분할을 공시했다.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에 초점을 맞추고 표 대결보다 경영진과의 물밑 대화에 집중한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지배구조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가 한국에서 연기금 돈을 끌어오려면 보다 중장기적인 전략을 펴야 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며 “기업 입장에선 주총 승리를 위해 앞으로 더 많은 비용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