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월트디즈니는 행동주의 투자자인 트라이언 파트너스와 이사 선임을 두고 위임장 대결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월트디즈니는 행동주의 투자자인 트라이언 파트너스와 이사 선임을 두고 위임장 대결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기업 공격 수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둔화로 실적이 악화하자 기업가치가 감소한 탓이다. 사업부 매각 등 우회 전략을 추진하는 곳도 증가했다.

지난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기업 공격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가가 하락한 기업의 이사를 교체하고, 기업의 인수합병(M&A) 전략에 직접 개입하는 강도가 높아졌다.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자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동원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투자은행(IB) 라자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기업 중 252개가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전년 대비 7% 증가한 수치다. 2019년 209개였던 행동주의 펀드의 모 기업 공격 사례는 2020년 173건까지 줄어든 뒤 2022년부터 반등하기 시작했다.

공격, 코로나19 때보다 45% 증가

2020년 공격 건수가 감소한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뒤 각국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추진한 결과다. 시장 내 유동성이 유입되자 기업가치는 증가했다. 주가가 오르자 기업과 주주 사이의 갈등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금리가 급격히 상승한 2022년부터 다시 반목하는 형국이다. 지난해에는 행동주의 펀드와 기업 간 분쟁이 252건을 기록했다. 팬데믹 때보다 45% 증가한 수치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다양한 기업이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 대상에 올랐다. 월트디즈니, 세일즈포스, 스타벅스 등 글로벌 대기업도 사냥감이 됐다. '기업 사냥꾼'이라 불리는 칼 아이컨의 아이컨 엔터프라이즈도 행동주의 펀드의 공매도 공격을 받아 주가가 반토막 난 바 있다.

지난해 초 행동주의 헤지펀드 트라이언 파트너스는 월트디즈니를 상대로 이사 자리 2개를 요구하며 주총 표대결을 선언했다. 넬슨 펠츠 트라이언 파트너스 CEO를 이사 후보로 내세웠다. 디즈니 CEO로 경영에 복귀한 밥 아이거 회장이 이들의 공세에 대응했다.

팬데믹 시기 대비 주가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디즈니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대규모 구조조정 정책을 발표하고 수익성도 시장 기대 대비 상향 조정되면서 한숨 돌렸다. 트라이언 파트너스는 디즈니에 대한 공개적 문제 제기 후 주가가 20% 가까이 오르자 공격 강도를 줄였다.

디즈니뿐 아니라 세일즈포스와 스타벅스도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노출됐다. 이들은 기업 이익이나 기업가치 대비 주가 흐름이 나쁘다는 점을 내세워 대규모 구조조정과 해외 경영전략에 대한 수정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 의석을 요구하기도 했다. 스타벅스의 경우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중국 사업 확대와 미국 내 중부·남부지역에 대한 지점 확대를 주문하기도 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지역도 확대됐다. 북미 지역에 본사를 둔 기업 공격에 집중했던 과거와 달리 유럽과 아시아 등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지난해 유럽에선 행동주의 펀드의 적대적 M&A가 69건 발생했고, 아시아 지역에서도 44건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있었다.

밀실 협상 등 공격 방식 다변화

리치 토머스 라자드 자본시장자문그룹 상무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이 세계 전역에서 역동적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아시아·태평양, 유럽 지역에서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이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 공격 방식도 다변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 헤지펀드들은 기업에 공개서한을 보내 주주들을 설득하는 데 집중했다. 우호 지분을 등에 업고 주가를 부양한다는 명분으로 기업경영에 개입하는 식이다.

FT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이 같은 전통적 공격 방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신 이사진과 밀실에서 협상하며 요구 조건을 관철하고 있다. 디즈니에서는 협상 기밀이 유출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여론이 집중돼 기업 경영진의 부담이 커진 모양새다.

시장에서는 지난해 주식시장 약세로 기업가치가 줄어들자 투자자들의 행동주의 공격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라자드에 따르면, 일반투자만 하던 펀드들이 지난해 처음으로 행동주의 공격에 나선 것이 전체 분쟁 건수의 40%를 차지한다. 또 행동주의 공격이 성공해 일주일 만에 합의에 이른 사례도 전체의 37%에 달했다.

토머스 상무는 “행동주의 펀드 환경이 급변하면서 공격 방식도 다변화되고 있다”며 “일반투자자와 행동주의 펀드를 가르던 기준선이 흐려지며 더 많은 캠페인이 수면 위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기업분할 요구도 증가했다. 자본시장 위축 여파로 M&A 시장이 얼어붙자 사업부 매각이라는 우회 전략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투자은행(IB) 바클레이스에 따르면 엘리엇 매니지먼트, 밸류액트 캐피털 등 행동주의 펀드들이 지난해 시도한 투자전략 중 기업 분할 및 사업부 매각이 49%를 차지했다. 최근 4년 평균값인 42%보다 7%p 증가한 수치다.
강성부 케이씨지아이 대표. 케이씨지아이는 국내 대표 행동주의 펀드로 2019년 한진칼과의 지분 싸움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사진=이솔 한국경제 기자
강성부 케이씨지아이 대표. 케이씨지아이는 국내 대표 행동주의 펀드로 2019년 한진칼과의 지분 싸움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사진=이솔 한국경제 기자
사업부 분할·매각 요구 늘어

엘리엇은 지난해 미국의 무선 통신 기업 크라운캐슬에 무선 송전탑 사업부를 매각하라고 촉구했다. 밸류액트 캐피털은 세븐앤드아이홀딩스에 세븐일레븐 편의점 사업부를 분할한 뒤 매각하라고 압박했다. 이레닉캐피털 매니지먼트와 스타보드 등도 〈뉴욕포스트〉를 보유한 뉴스코퍼레이션에 부동산 사업부를 매각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행동주의 펀드가 우회 전략을 쓰는 건 M&A 시장이 급격히 냉각된 영향이 크다.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M&A 규모는 전년 대비 18% 줄어든 약 3조 달러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내 최저치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투자금 회수(엑시트)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기업을 통째로 매각하는 대신 사업부 단위로 분할한 뒤 매각하는 우회 전략을 짰다는 설명이다.

짐 로스먼 바클레이스 글로벌 주주 자문 책임자는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지난해 기업에 고금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몸집을 줄이라고 꾸준히 압박했다”고 말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주요 전략이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경영진에 대한 압력은 줄어들었다. 리서치업체 인사이티아에 따르면,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캠페인 중 경영진과 이사진 교체를 요구하는 안건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2022년에는 전년 대비 46% 증가한 26.2%였다.

오현우 한국경제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