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미래에 써야 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비용을 미리 부채에 반영토록 하는 공시기준 정비에 나섰다. 넷제로 선언 등으로 인해 기업이 감내해야 할 기후 비용을 사전에 충당부채로 반영하자는 게 핵심이다. 이에 중국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녹색 비용 놓고 서방과 중국이 '회계 전쟁'에 돌입하는 양상이다. SK·삼성 등 RE100(재생에너지 100%)을 선언한 국내 대기업도 부채 폭탄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소중립 선언했는데, 왜 충당부채 안 쌓나?

5일 한국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IASB는 지난달 열린 글로벌재무제표작성자포럼(GPF)에서 넷제로 비용의 충당부채 인식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에 돌입했다. 현행 회계제도(IAS 37)에서는 미래에 기업의 현금이 유출될 가능성이 크고, 그 금액을 추정할 수 있을 경우 충당부채로 인식해 재무제표에 기록해야 한다. 미래에 기업의 돈통에서 사라질 돈이라면 미리 부채로 인식하는 게 기업의 재무 현황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회계처리라는 점에서다.
[단독] 美-中 '회계전쟁' 시작됐다…'넷제로 충당부채' 놓고 대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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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SB가 제도 정비에 나선 것은 각 기업의 녹색 비용을 어떻게 부채로 인식할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30년까지 제품 생산 과정에서 순탄소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애플의 경우 사전에 미래에 지출할 기후 비용을 부채로 인식해야 한다는 게 IASB의 판단이다. 지난달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마련해 내년부터 적용에 나서기로 한 만큼 회계기준도 이에 연동해야 한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웅희 한국회계기준원 지속가능경영지원센터장은 "녹색 비용의 충당부채 인식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며 "내년부터 기후공시기준이 실제 적용되기 때문에 연내 결론을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K·KB금융 등 대규모 충당부채 쌓나?

녹색 비용을 둘러싼 국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국내 산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국내 기업이 감당해야 할 넷제로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예를 들어 RE100에 가입한 기업의 경우 전력구매비용, 탄소배출권거래 비용, 태양광 발전소 건립 비용, 송전 비용 등을 모두 부채로 잡아야 할 수 있다. 특히 신재생에너지 인프라가 부족한 한국은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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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 중에 대표적인 녹색 비용으로 손꼽히는 RE100에 가입한 곳은 총 27개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KB금융, 미래에셋증권, 네이버, 현대차, 기아, LG이노텍, 롯데칠성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이 실제로 RE100을 이행하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100% 재생에너지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태양광 발전소를 반도체 공장 근처에 직접 지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탄소배출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면, 탄소배출권을 사서 메꿔야 한다. 재생에너지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에 비해서 제품 생산 비용이 더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다. 사내 차량을 모두 전기차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기업의 경우엔 차량 구매비도 미래 부채다. IASB는 이를 모두 계산해 단계적으로 재무제표에 반영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한 관계자는 "그동안 기업의 탄소중립 선언이 홍보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다"며 "하지만 이제부터 실질적인 재무 부담으로 반영되게 됐다"고 설명했다.

IASB는 작년에 ESG 공시기준 마련을 위한 별도 회계 기관인 ISSB를 설립했다. ISSB는 지난달 1차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인 S1과 S2를 발표했다. S1에 기후 관련 공시기준이 총망라됐다. ESG 공시기준은 2024년부터 적용돼 2025년부터 기업 재무제표에 반영해야 한다. 한국은 우선 간소화된 별도 ESG 기준을 연내 마련해, 상장사부터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단 한국은 국제회계기준을 국내에 전면 적용하고 있어서 ISSB기준도 상당 부분 준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중국과 서방의 '녹색' 회계 전쟁

지난달 GPF 논의 안건으로 녹색 비용 충당부채 인식 문제가 부상하자 중국을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ESG 공시에 대한 사전 준비가 부족한 개도국 기업들의 경우 상대적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 존립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이 탓에 회계업계 일각에서는 IASB를 장악하고 있는 유럽과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강력한 기후공시 기준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이른바 '기후 담론'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회계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이 중국을 공격하는 주요 수단으로 '기후 위기'를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중국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27%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탄소 배출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기술과 준비가 미국 등 서방에 비해서 부족하다는 점에서 기후 관련 규제가 강화되면 당장 중국과 중국기업이 타격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미국은 중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무역 동맹인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서도 최우선 과제로 기후 문제를 다루고 있다. 탄소를 배출해 생산한 제품에 대해서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는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도 중국의 '더러운 철강'을 겨냥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애플, 구글, 바이오젠, 제너럴밀스, HP, 델 등 주요 기업들을 중심으로 탄소중립 준비에 돌입한 상태다. 애플은 2030년까지 넷제로 선언한 뒤 전환작업 착수했다. 구글은 5GW 용량의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바이오젠은 전 공급망에 걸쳐서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이미 BMW·볼보 등 유럽의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은 협력 업체에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제품이 아닐 경우 납품을 받지 않겠다는 요구를 하고 있다. 각국 정부도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갖추는데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선진국의 경우 자국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비교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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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국이다. 수소,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서 급격한 기술혁신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재생에너지로 국가 전체 에너지 수급을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국가라는 점에서다. 바람이 약하고, 국토 면적이 넓지 않은 등 재생에너지 활용에 불리한 지리적 환경의 영향이 크다.

이에 충당부채 인식 시점을 최대한 늦추는 회계 전쟁에 한국도 가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진국 클럽과 중국은 충당부채 인식 시점을 놓고 충돌하고 있는데, 한국도 이 사안에서는 중국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충당부채 인식 시점을 RE100 선언 시점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자금 집행 시점 할 것인지가 논란이 될 수 있다. 만약 2035년이 넷제로 목표 시점이라면 부채 인식 시점을 넷제로 선언 시점이 아니라 비용이 투입되는 2030년께로 늦춰서 부채를 쌓을 수 있다는 의미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기후 비용 룰 세팅을 놓고 치열한 회계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며 "미국, 유럽, 중국 등이 국가의 사활을 걸고 국익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한국은 사실상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이 IASB 이사회 자리를 빼앗기면서 국제 회계 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이 너무 약해져 있다"며 "이대로 가면 선진국 입맛대로 룰 세팅을 하고, 한국 기업들만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