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원유 가격 상한제’에 동참하는 국가에 석유 및 관련 제품을 팔지 않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책임을 묻기 위해 서방이 내놓은 제재안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러시아 변수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약보합세를 보였다.

“가격 상한?…그럼 안 팔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사진)은 27일(현지시간)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를 도입한 국가와 기업에 석유 및 관련 제품 판매를 금지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내년 2월 1일부터 7월 1일까지 5개월간 한시적으로 시행한다.

러시아산 석유·석유 제품 공급 계약에 가격 제한 내용이 명시돼 있을 경우 공급을 금지하고, 푸틴 대통령의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수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석유는 2월 1일부터 수출을 금지한다.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 제품의 수출 금지 시기는 러시아 정부가 별도로 지정하기로 했다. 크렘린궁은 “이번 조치는 미국 등 다른 국가와 국제기구가 동참하는 비우호적이고 국제법에 모순되는 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7개국(G7)과 EU, 호주 등 27개국은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지난 5일부터 국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러시아산 원유 가격을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이 기준을 지키지 않는 해운사는 미국·유럽 등의 해운 보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게 했다. 러시아가 제3국에 높은 가격으로 원유를 판매해 금수 조치를 무력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러시아는 “원유 관련 제재는 세계 에너지 시장의 수급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부총리는 23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현 상황에서 유가 상한제를 따르느니 감산이라는 위험을 선택하겠다”며 “내년 초 석유 생산량을 최대 7%까지 줄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 재무장관 “나라 살림에 압박”

푸틴 "러 원유값 상한 도입국에 기름 안 팔겠다"
러시아의 하루 석유 생산량이 평균 1000만 배럴임을 고려하면 하루 최대 70만 배럴에 해당하는 석유가 공급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노바크 부총리는 “러시아는 서방 이외의 국가로 판로를 다변화해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상한제 시행 이후 인도로 발길을 돌린 러시아산 유조선은 열흘 만에 7척 이상인 것으로 추정됐다.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러시아산 원유 가격이 상한선을 밑돌고 있어 당장 러시아발 에너지 대란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산 원유는 배럴당 56달러 수준에 거래되고 있다. 이날 러시아발 공급 압박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내년 2월물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는 전거래일 대비 0.03달러(0.04%) 하락한 배럴당 79.53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러시아 내에선 서방의 원유 제재안이 결국 나라 살림에 압박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이날 한 언론 인터뷰에서 “유가 상한제로 인해 러시아의 내년 예산 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을 훨씬 넘어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러시아산 원유 공급 총량을 줄이겠다는 노바크 부총리의 으름장을 거론하며 “원유 판매 수익이 모자라면 결국 채권 발행이나 대비기금(rainy day fund·불경기에 쓰기 위해 쌓아둔 호경기 초과 세수)에 손을 벌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편 전쟁 이후 에너지 대란을 겪은 유럽에선 천연가스 가격이 메가와트시(㎿h)당 80.04유로로 전쟁 이전 수준(79.74유로)으로 떨어졌다. 평년보다 높은 겨울철 기온과 탄탄한 가스 비축량 덕분인 것으로 풀이된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