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끊기고 도배·장판도 못 했는데 명절은 무슨…태풍 비껴갔으면"
"그래도 가족들 모일 생각에 힘이 나네요"…굵은 땀방울에서 희망을

"산사태로 전기가 끊긴 지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복구가 안 돼 답답하네요.

올 추석은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할 듯합니다.

"
추석 코앞인데…복구지연·물가상승·태풍에 한숨 여전한 수재민
지난달 9일 500㎜의 기록적인 집중폭우로 산사태가 나 마을 자체가 사라진 강원 횡성군 청일면 속실리 일명 '매더피골' 주민 유병렬(64) 씨는 한숨만 내쉬었다.

산사태 한 달여 만인 지난 1일 찾아간 매더피골은 폭격을 맞은 듯한 산사태 직후 모습 그대로였다.

아랫마을은 어느 정도 응급복구가 이뤄져 차량이 겨우 진입할 수 있었지만, 윗마을은 500여m에 달하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만 앙상하게 속살을 드러내 보일 뿐 여전히 위험해 차량 진입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윗마을 사는 유씨는 불행 중 다행으로 산사태를 겨우 피한 텃밭에서 수확한 붉은 고추를 햇볕에 내 말리면서도 한숨은 끊이지 않았다.

추석 코앞인데…복구지연·물가상승·태풍에 한숨 여전한 수재민
그는 "산사태가 10m만 더 옆으로 들이쳤더라면, 내 집도 저 아래 집처럼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때는 형님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끔찍하다"고 몸서리쳤다.

그는 "전신주가 다 부서져 전기가 끊긴 지 한 달이 다 돼간다"며 "지은 농사는 마무리해야 하고 기르는 개와 고양이 등 동물들도 있어 떠날 수가 없다.

올 추석은 영 글렀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 보니 진입도로 500m 구간 곳곳에는 부서지고 으깨진 전신주가 파편 조각으로 나뒹굴었다.

유씨의 말처럼 한동안 전신주 복구는 요원해 보였다.

추석 코앞인데…복구지연·물가상승·태풍에 한숨 여전한 수재민
당시 집중호우는 경기와 서울, 충청 등 중부권을 집중적으로 강타했다.

산사태로 곳곳이 마치 폭격당한 전쟁터 같은 참혹한 모습이었던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마을은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명절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산자락에서 밀려온 토사와 나뭇가지에 집 앞마당은 물론 근처에서 운영하는 가게까지 엉망이 돼 큰 피해를 본 이 마을 주민 전모(55) 씨에게 올해 추석은 전혀 반갑지 않다.

전씨는 "시와 면사무소, 자원봉사자들 도움으로 많이 치워지긴 했는데 아무리 청소해도 불쾌한 냄새는 여전하고 바닥 걸레질을 하면 어디에 있던 건지 흙이 계속 묻어 나온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달 가까이 버릴 건 버리고 고쳐 쓸 수 있는 건 말리고 수리해 어수선하던 걸 겨우 치웠다"며 "명절이고 뭐고 복구하느라 돈도 많이 쓰고 요새 장사도 안돼 추석을 쇨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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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역시 지난달 초 내린 집중호우의 상흔이 채 아물지 못한 모습이었다.

수해를 입은 지 약 한 달이 지났지만, 일부 집은 벽면 일부가 부서져 집안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등 여전히 복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무너진 담장을 수리하고, 망가진 가구를 집 밖으로 빼내는 등 피해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무너진 집을 넋 놓고 쳐다보던 70대 강금순 씨는 "추석에 어디 가진 못하니 차례라도 지내려고 해도 물가가 너무 올랐고, 태풍까지 온다는데 이젠 빗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벌렁하다"며 울먹였다.

구룡마을에서 20년 넘게 살았다는 70대 최모 씨도 "수해 때문에 이 동네엔 냄비 그릇 하나 없는 집이 수두룩하다"며 "무슨 명절을 지내겠냐. 태풍이라도 멀리 비껴갔으면 좋겠다"고 한숨지었다.

추석 코앞인데…복구지연·물가상승·태풍에 한숨 여전한 수재민
충남 부여군 은산면 홍산1리에서는 현재 3가구 4명의 이재민이 마을 경로당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시 이 마을은 지난달 14일 새벽 쏟아진 폭우로 주택·상가 144채가 침수·파손되고 농경지 500여ha가 매몰되는 등 큰 피해가 났다.

대부분 60∼70대인 이 마을 주민들은 밤에는 마을 경로당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평소처럼 밭에서 고추와 포도 등 농작물을 수확하는 이재민 생활을 18일째 이어가고 있다.

이재민 김재순(70) 씨는 "지난 14일 새벽 폭우로 새로 지은 집이 물에 잠겨 아내와 함께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며 "당시에는 '내 삶이 이렇게 무너지나'하는 절망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도배·장판을 새로 하는 등 집을 새 단장 하고 있고, 주말에는 가구와 전자제품도 새로 들여놓을 예정"이라며 "다행히 추석 전 귀가해 가족과 함께 추석 연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안도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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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의 기록적인 폭우로 살던 집 마당에 물이 엉덩이까지 들이차는 침수피해를 본 횡성군 서원면 유연리 원명호(68) 씨는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야 이제 겨우 보일러를 고쳐 집 내부를 말리고 있었다.

5남 3녀 8남매의 장남인 그는 구순과 팔순의 노부모를 모시고 평생을 살면서 이런 물난리는 처음 겪었다.

원씨는 "명절 때마다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였는데…"라며 "급한 대로 집을 말리고 도배와 장판이라도 해 8남매가 잠이라도 잘 수 있도록 해야죠. 그래도 민족의 명절 추석인데 가족들 모일 생각에 그나마 힘이 나네요"라고 말했다.

원씨의 움푹 팬 주름살과 옅은 미소 사이로 흐르는 굵은 땀방울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빛이 읽혔다.

(윤우성 이승연 이우성 이은파 이재현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