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1차 협력업체인 국내 중견기업 A사는 지난해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을 늘리라’는 주문을 받았다. A사는 곧장 대응 방안 검토에 들어갔지만, 금세 난관에 부딪혔다. 애플의 요구에 맞추려면 대대적인 시설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결국 A사는 한국전력에 추가 요금을 내고 재생에너지 전력(녹색프리미엄)을 구매하기로 했다.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임시방편을 택한 것이다. A사 관계자는 “당장 협력사 평가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미봉책을 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대기업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기준이 강화되면서 중견·중소기업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14일 신한은행의 ESG컨설팅셀에 따르면 국내 중견·중소기업들은 ‘천차만별’인 대기업 ESG 요구 사항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기아 한국GM 현대모비스에 납품하는 충남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는 대기업들의 각기 다른 ESG 요구 사항과 규제 기준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GM은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에코바디스 등 여러 이니셔티브에 대한 동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하청 업체 관리에도 신경써야 한다. 2~3차 협력업체에 대한 ESG 관리 책임을 1차 협력업체에 돌리는 대기업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중견·중소기업들은 “장기 전략은 고사하고 눈앞의 과제 해결에 급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ESG 경영은 장기적으로 차근차근 추진되고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럴 여유 없이 원청사의 각종 요구사항이 급작스럽게 쏟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원청업체의 지나친 ESG요구로 중견·중소기업들이 ‘그린워싱(greenwashing·위장환경주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린워싱은 기업이 제품, 운영·서비스 등과 관련해 ESG 지표를 과장하거나 잘못 표현해 경제적 이익을 보는 마케팅 관행을 뜻한다.

지난해 1월 출범한 신한은행 ESG컨설팅셀은 국내 중견·중소기업에 무료 ESG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90여 개 기업이 무료 컨설팅을 받았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