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와 법
ESG 시대, 지배구조의 역할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논의에서 지배구조(G)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온실가스 배출 저감이나 작업환경에서의 안전과 같이 비교적 목표가 뚜렷한 환경(E)이나 사회(S)와 달리 지배구조(G)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지배구조 문제는 앞의 두 요소와 달리 계량화해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지도 않다. 회사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절반으로 감축했다면 이는 환경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반면 사외이사가 5명인 회사가 3명인 회사보다 지배구조가 우월하다고 볼 수 있을까? 사외이사 수를 늘린다고 해서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가 줄거나 일반 주주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 ESG에서의 지배구조(G)가 기존 회사법에서의 논의와 무엇이 다른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회사법은 경영진과 주주, 지배주주와 소액주주, 주주와 채권자 같은 이해관계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을 핵심 목적으로 삼고,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대리인 문제라는 시각에서 보면, 회사의 경영은 주주가 아니라 이사회를 비롯한 경영진이 담당하므로 본인(principal)인 주주나 회사의 부는 대리인(agent)인 경영진이 어떻게 경영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회사법은 경영진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회사 이익을 위해 업무를 처리하도록 선관주의 의무, 충실 의무 같은 법적인 의무를 부과하고, 스톡옵션을 통해 주주의 이익을 추구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혼란스러운 ESG 지배구조 논의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말 금융위기 이후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 추구를 통제하고 일반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회사법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사의 책임과 관련한 수많은 대법원 판례 역시 금융위기 이후인 2000년대 들어 대부분 축적되었다. 일부 지배주주들의 사익 편취, 부실 계열사에 대한 지원,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일부 불법행위처럼 우리나라에서 문제시되던 실제 사례를 해결하면서 지배구조와 관련한 법리도 크게 발전했다. 상법이나 공정거래법도 금융위기 이후 수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회 제도의 도입과 강화, 업무 집행 지시자에 대한 책임 추궁, 각종 사익 편취 행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왔고, 기업들도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ESG 논의가 지배구조(G) 문제를 강조하니 기존의 노력에 더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기업도 이사회 내에 ESG 위원회를 신설하고 대규모 상장회사들이 자본시장법을 준수하기 위해 여성 사외이사를 추가 선임하는 것 외에 ESG 논의 이후 지배구조 분야에서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ESG에서 지배구조(G) 논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SG 논의의 출발점이 된 2004년 유엔 글로벌 콤팩트의 ‘후 케어스 윈즈(Who Cares Wins)’는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임직원의 보상 구조를 장기 주주가치에 연동하며 책임성을 강화하는 것이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바람직한 지배구조 체제가 수반되어야 환경·사회문제 개선과 장기 주주가치 추구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지배구조(G)를 회사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종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최근 외국의 논의에서는 회사의 목적(corporate purpose)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회사의 목적을 주주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가치(shared value)를 제공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상법이 정관에 회사의 목적을 기재할 수 있도록 개정한 것이나, 외국 기업이 앞다퉈 회사의 목적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SK그룹 계열사들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정관 전문에 이해관계자 가치 증대 등의 경영 목적을 기재했고, 올해 들어서는 HDC현대산업개발이 공사 현장 붕괴 사고 이후 네덜란드 연금운용사인 APG의 요구에 따라 지속 가능 경영 체계 관련 내용을 정관 전문에 포함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ESG에서 지배구조(G) 논의는 기업이 단기적 주주가치 추구로부터 탈피해 환경·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참하도록 하고, 이러한 목적을 구현할 수 있는 의사결정 체계와 임직원 보상 구조를 갖추는 데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권고적 주주제안과 같이 장기적 주주가치를 추구하는 주주들에게 회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결권자문사인 ISS의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미국에서는 회사의 기후변화 관련 정책 공개 등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이 전년도의 58건에서 87건으로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14개 국가에서 기후변화 관련 주주제안이 이뤄졌다.

획일적인 하나의 정답은 없다

하지만 기업 지배구조 문제는 각 국가나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경영진이나 주주의 단기적 가치 추구가 환경·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단기적 주주가치 추구 문제가 특별히 심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지배주주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면서 이익 배당을 잘 실시하지 않는 등 일반 주주의 단기적 가치 추구에 반하는 방향으로 경영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장회사 주식 보유가 분산된 경우가 많은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경영진을 견제하기 위해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는 것이 의미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에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해도 이들이 서로 견제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는 주식 소유 구조, 상법, 공정거래법, 세법 등 관련 법제도, 법원의 태도, 기관투자자의 활동 등 여러 복잡한 상호작용을 거쳐 결정되기에, 어느 하나의 방식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하나의 지배구조만이 바람직하다면 일찍부터 기업 지배구조 준칙(Corporate Governance Code)을 제정해 준수하고 있는 영국 기업의 기업가치가 가장 높아야 한다는 웃지 못할 지적도 있다. 지배주주가 존재하면 나쁜 지배구조, ESG 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으면 좋은 지배구조라는 식의 획일적 접근이나 ESG 평가 역시 타당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지배구조(G) 문제는 지배주주의 지배권 남용을 방지하고 일반 주주를 적절하게 보호하는 데 있다. 물적분할 후 재상장, 기업 내부자의 예고 없는 주식 처분, M&A 과정에서의 일반 주주 소외 같은 일반 주주 보호 문제가 여전히 우리 자본시장의 중요한 현안으로 남아 있다. 회사법의 원칙을 준수하고 이를 적절하게 집행하는 것이 지배구조(G)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