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노 같은 일이다.”

2015년 1월 아소 다로 당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현 자민당 부총재)은 경제단체 초청 신년회에서 기업에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도 임금 인상과 설비 투자에 인색하다는 비판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 들어서도 부정적인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은 작년 10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기업의 내부유보가 전례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내부유보금은 기업이 매년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를 쌓아놓은 적립금이다. 일본 정치권이 민간 기업의 금고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배경에는 괘씸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규모 경기부양책)를 통해 지난 10여 년간 의도적으로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법인세를 낮춰줬다. 이익이 늘면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임금을 올려 소비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업은 임금을 올리는 대신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을 높여 인건비를 더 줄였다. 2020년 일본 기업의 내부유보금은 484조엔으로 9년 연속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시기 내부유보금은 1.6배 늘었다. 정치권이 ‘돈을 벌게 해줬더니 자기 주머니만 채운다’고 비난하는 이유다. 여당인 자민당이 내부유보금에 비례해 세금을 물리려 한 적도 있다.

일본 기업이 수전노라는 비난을 감수하는 것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워낙 뿌리 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거품(버블) 경제 붕괴 이후 30년 장기 침체에서 살아남은 일본 기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동일본대지진, 2020년 코로나19를 차례로 겪었다. 미·중 패권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경영 환경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포스트 코로나에 대비한 사업 전환도 서둘러야 한다.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은 일본 소비자도 기업 못지않다. 2021년 일본의 가계는 연 수입의 34.2%를 저축했다. 저축률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지난해 월평균 소비지출은 27만9024엔으로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보다 4.6% 감소했다. 2021년 말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은 2023조엔으로 2000조엔을 처음으로 돌파했다. 1992년 1000조엔을 넘어선 지 30년 만이다. 가계 금융자산의 54%인 1092조엔은 예금과 현금에 묶여 있다. 주식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주식과 현금 비중이 각각 40%, 10%인 미국과 반대다.

현금과 예금을 주식시장과 같은 성장 분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일본 경제의 부활과 직결되는 문제로 평가된다. 일본 정부는 수십 년째 개인 금융자산을 저축에서 투자로 돌리기 위해 애써왔지만 허사였다. 일본 중장년층은 버블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주식증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경험한 세대여서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