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네덜란드 病' 고친 바세나르 협약
네덜란드 정치 중심지인 헤이그 인근의 휴양도시 바세나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부촌이다. 인구는 2만5000여 명에 불과하지만 외교관과 다국적 기업 임원들이 많이 산다. 굵직한 국제협약들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30여 년 전인 1982년 11월, 네덜란드 노동조합총연맹위원장인 빔 콕이 이곳에 있는 경영자연합회장의 집을 찾았다. ‘자원의 저주’ 때문에 물가·임금이 급등하고 제조업이 무너지는 ‘네덜란드 병’으로 국가 전체가 신음하던 때였다. 청년실업률은 30%를 웃돌았다. 두 사람은 실업 문제 해결을 놓고 마라톤 협상을 벌였다.

며칠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노조는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경영계는 근로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바세나르 협약이 탄생했다. 정부는 세금을 낮춰 기업 부담을 덜어 주면서 생산과 고용 확대를 유도했다. 이로써 수출 경쟁력이 회복되고, 일자리가 늘었으며, 재정안정과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노사정(勞使政) 대타협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이 협약은 네덜란드의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현재 고용률은 76%를 웃돈다. 한국의 올 1~8월 고용률 61%보다 15%포인트나 높다.

비판도 많았다. 노조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임금 억제와 노동시간 단축으로 여성 파트타임 노동자를 늘릴 뿐”이라며 반발했다. 빔 콕 위원장은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국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비정규직 취업자의 72%는 “풀타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부 중 한 명의 풀타임과 한 명의 파트타임을 합친 ‘1+0.5 방식’을 선호한다.

근무 시간의 양보다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국민성도 작용했다. 네덜란드의 노사정 타협 정신은 ‘폴더(polder·간척지) 모델’로 발전했다. 국토 대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이 나라 사람들이 힘을 합쳐 땅을 간척한 것에서 유래한 용어다. 노동 유연성과 일자리 나누기로 노동 개혁을 앞당긴 동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바세나르 협약을 여러 번 접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지난달에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바세나르 협약을 언급하며 “그동안 표류해온 노사정위원회 대신 새 위원회를 출범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제 우리 실정에 맞는 노사정 대타협을 이룰 때가 왔다.

바세나르 협약 체결 후 1994~2002년 총리로 네덜란드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빔 콕이 어제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 ‘새만금 홍보 전도사’로도 활동한 그의 대타협 정신으로 ‘한국판 바세나르 협약’이 빨리 체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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