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구조조정 난제, 책임 공유로 풀어야
이제는 어느덧 40줄에 들어선 제자가 연휴 중 집에 놀러 왔다. 흔히 말하는 스펙도 출중하고 성격도 그만인데 아직도 미혼이다. 소주 몇 잔 걸치더니 자조적인 목소리로 “장가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푸념한다. 그 친구 얘기는 이렇다. 요즘 여성들은 데이트할 때 상대가 사지선다형과 같은 객관식 문제를 얼마나 잘 준비했는지에 따라 평가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저녁 식사의 경우 ‘한식이면 A식당, 양식이면 B식당, 중식이면 C식당’ 등 객관식 선택지를 제시해야 한다. 저녁 식사 후 영화 구경을 할 때도 상영 중인 영화 목록과 영화관을 선별해 준비해 가야 한다. “저녁은 뭘 먹을까요?”나 “영화는 뭘 보고 싶습니까”라는 주관식 문제를 제출했다가는 그날로 퇴짜다.

그 친구가 돌아간 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여성들의 이런 행태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남성들의 준비성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책임의 공유라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있다. “뭘 먹을까”라는 질문은 상대에게 모든 선택을 강요한다. 만약 선택한 식당의 음식이 별로면 모든 책임은 선택한 사람에게 귀속된다. 반면 객관식은 제시된 선택안 중 하나를 골랐기 때문에 책임은 양자가 일정 부분 공유한다. 따라서 정보경제학 측면에서 보면 객관식으로 선택지를 주는 것이 보다 공정한 게임이 된다.

우리 경제는 해운과 조선 등 한계산업의 구조조정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해운업체는 현대상선의 자율협약에 이어 한진해운 역시 지난주 조건부 자율협약을 개시하기로 했다. 부실 규모나 고용 관련 사회적 파장이 훨씬 큰 조선업은 이제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인위적 통폐합은 없다고 선언하면서도 주채권은행을 통해 최대한의 자구계획을 받고 이행 여부를 점검할 방침이다.

구조조정은 불확실성 아래의 선택으로 신속하고 과감해야 한다. 하지만 두 가지 난제를 풀어야 한다. 첫째는 회생 가능성이 불확실하므로 이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둘째, 궁극적으로 구조조정은 채권자, 근로자, 주주 및 일반 국민까지 포함해 모든 이해당사자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누가 얼마만큼 손해를 볼지에 대한 이해 상충 문제 역시 풀어야 한다.

이런 난제 해결을 전적으로 정부에 위임하는 건 문제가 있다. 구조조정은 결국 사후적으로 어떤 결정이 최적이었는지 알게 된다. 과거 두 차례 공적 자금 투입 사례를 보면 사후적으로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가정법 과거완료형 주장을 하면서 청문회를 열고 당시 공무원을 줄줄이 불러 망신을 주고 문책했다.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주관식 문제를 받아든 격이고 자신들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정치권이 사후적으로 문제를 삼을 준비가 돼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는 폭탄 떠넘기기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은행 매각이 근 반세대가 지나도록 이뤄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섣부르게 팔았다가 추후 주가라도 오를 경우 헐값 매각으로 곤욕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조라는 벽을 넘어야 하는데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사례에서 보듯 정치쟁점화될 소지가 크다.

조선업체는 이들 업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만큼 일부 정치권이 이를 쟁점화하고 이용할 경우 구조조정 자체가 좌초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경제 침체가 지속되면 조선과 해운 외에 타산업도 구조조정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구조조정 초기부터 아예 정치권이 개입하는 것이 낫다.

구조조정과 구제금융 원칙이나 재원 마련 등은 여야 정치권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도출한 뒤 개별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객관식 선택지를 정부에 주는 것이 상기한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고 오히려 신속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유도할 수 있다. 책임의 공유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안동현 < 자본시장연구원장 ahnd@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