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거둥길
왕이나 세자가 경복궁에서 밖으로 이동하는 경로는 다양했다. 몇 년 전 발굴된 광화문 동쪽 담의 용성문과 흥례문 주변의 협생문도 왕의 출입로였다. 경복궁 복원사업 중 광화문 동쪽 궁장(宮牆·궁궐을 둘러 싼 성벽)과 흥례문 동·서 회랑에서 남쪽 궁장으로 이어지는 내부 담장의 문 두 개가 확인된 것이다.

용성문은 신무문(북문)이나 영추문(서문)을 통해 궁 밖으로 이동할 때, 협생문은 세자가 동궁으로 드는 측문인 이극문에서 광화문 밖으로 나갈 때 사용했다고 한다. 박석(얇고 평평한 돌)이 정연하게 깔린 사다리꼴 형태의 기단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 앞의 세 갈래 길도 박석으로 정돈돼 있는데 가운데 약간 높은 부분이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다. 창덕궁의 돈화문에서 금천교 가는 길 역시 그렇다.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은 어로(御路), 혹은 거둥길로도 불렸다. 어쩌다 신하들이 잘못 밟으면 불경죄로 혼쭐이 났다.

연산군 때 의전담당관 김극회가 임금을 인도해 계단을 내려가다가 잘못해 어로를 지나고, 기록관인 신상이 창졸간에 실수했다고 해서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의 진입로는 신로(神路)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가운데가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이 왕, 왼쪽이 세자의 길이다.

궁궐에는 왕의 안전을 위한 비밀통로가 여러 군데 있다. 성벽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암문(暗門)이 있다. 글자 그대로 은밀한 통로여서 구석진 곳에 작게 만들었다. 한양도성의 북쪽문인 숙정문도 처음에는 암문으로 설계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암문이 16개로 가장 많고, 수원 화성에 5개가 있었으나 4개만 남았다.

덕수궁엔 인근의 러시아공사관과 통하는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고종이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다는데, 커피 독살설을 다룬 영화 ‘가비’에도 등장했다. 1981년 서울시의 발굴 과정에서 그 사실이 인정됐지만 나중엔 지하창고를 연결한 길이라는 주장이 대두됐다.

없어질 뻔한 왕의 길을 되살린 사례도 많다. 서울 종로구는 창경궁 집춘문부터 성균관 문묘까지 이어지는 거둥길을 2008년 복원했다. 왕과 세자가 성균관으로 행차하던 길을 관광코스로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손발이 맞지 않아 ‘막힌 길’이 돼버렸다. 민가 담장을 헐고 화강암 도로까지 깔아놨다는데, ‘거둥길 닦아 놓으니까 깍쟁이가 먼저 지나간다’는 속담처럼 애써 해 놓은 일이 보람도 없게 됐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