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권을 강화하고 지역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시 · 군 행정구역 자율통합이 난항을 겪고 있다. 주민이나 주민단체 중심으로 통합 건의된 지역에서 시장 · 군수가 공무원과 통 · 리 · 반장들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통합 방해 행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 의사 표현이 3 · 15 부정 선거 때보다 더 왜곡돼 찬성 측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자치시대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관권 개입'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이에 따라 자율통합 공청회나 설명회가 잇따라 무산되고 주민 여론조사 일정이 늦춰지는 등 파행이 빚어지고 있다.

14일 행정안전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르면 자율 통합을 방해하기 위한 각종 관권 개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공무원이나 통 · 리 · 반장을 동원한 통합방해가 이뤄지고,'통합하면 식민지 전락' '공무원 3분의 1 이상 축소' '통합되면 1인당 ○○원 손해' 등의 허위사실도 유포되고 있다.

청주시와의 통합이 건의된 청원군에서는 읍 · 면장 및 통 · 리장을 통한 통합 반대가 이뤄지고 있다. 반상회나 경로행사에 공무원들이 참석해 통합 반대를 설명하고 마을방송까지 한 것으로 파악됐다. 모 읍장은 통합건의 서명부에 서명하지 말라고 설득하다 주민이 신고하자 사과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통합건의서에 서명한 주민 명단이 공무원들에 의해 유출되고 이장이 서명부에서 탈퇴토록 압력을 행사하자 한 주민은 통합건의서에 "공무원과 이장의 압력에 의해 서명 철회"라는 메모까지 남겼다.

전주시와의 통합이 건의된 완주군에서도 통합 반대를 위한 공무원들의 조직적 개입이 확인됐다. 완주군 모 면사무소 직원은 차량을 동원해 통합찬성 플래카드를 철거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통합 건의서 서명자 명단을 통합 반대 단체인 '완주사랑지킴이'측에 넘겨 이장이 서명자에게 서명 여부를 직접 확인하는 형태로 탈퇴 압력을 행사했다.

구리시도 통합 반대를 위한 관권 개입이 거센 상황이다. 구리시 모 국장은 과장과 팀장에게 할당된 인원만큼 통합 반대 서명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동장을 중심으로 통장 반장 부녀회 경비원 청소년까지 반대 서명을 받는 데 동원됐다. 시장은 동장들에게 서명운동 동향을 일일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포시 · 신안군과 통합이 거론되는 무안군의 경우 6급 이상 5만원,7급 이하 3만원씩 활동비를 모아 통합반대 단체인 무안사랑포럼에 지원했다. 무안사랑포럼은 이장단과 새마을지도자 등과 함께 익산시 함열읍과 순천시 승주읍 등 과거 도 · 농 통합의 실패 사례만 선별적으로 견학했다.

지자체장과 해당 공무원들의 조직적 반발로 자율통합 작업은 초기부터 삐그덕거리고 있다.

지난 13일 충북도청 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던 청주 · 청원 통합 찬반 주민 공청회는 조직적으로 통합반대 행위를 해오고 있는 청원군의 불참으로 무산됐다. 청주-청원 통합의 경우 경제적 · 지리적으로 가능성이 매우 높아 설명회 등의 절차를 조기에 마무리하고 자율통합 시범케이스로 활용하려던 것이 정부 구상이었으나 청원군의 조직적 반대로 향후 일정조차 불투명해졌다.

행안부는 일부 지자체장과 공무원들의 관권 개입으로 통합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고 판단,당초 이달 중순께로 예정했던 여론조사 일정을 이달 말께로 연기키로 방침을 바꿨다. 설명회 등을 적극 개최해 통합 당위성을 널리 알린다는 계획이다. 여론조사는 국내 4대 조사기관이 16개 지역 46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1000명가량씩 설문조사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행안부 관계자는 "자율통합으로 지자체장 숫자가 줄어들면 이들 지자체장은 물론 지자체장에 줄을 댄 공무원,이들과 유착관계인 지역 기업인들이 불이익을 우려해 본격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며 "관련 법령 검토를 거쳐 자치단체 공무원들의 조직적 개입에 대해 엄중 조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박기호 기자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