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骨品制)는 신라의 신분제도다.

출신에 따라 성골과 진골 및 1∼6두품으로 나눠 관등은 물론 결혼대상,가옥의 규모,생활용품의 종류와 수까지 제한했던 계층세습제였다.

성골은 부모 모두 왕족,진골은 왕족과 귀족 사이,4∼6두품은 관직 진출이 가능한 지배층,1~3두품은 평민이었다.

신분이 낮으면 실력에 상관없이 정ㆍ관계에 나가지 못하고 나가도 특정 직급 이상 승진할 수 없었다.

17개 관등 중 제1관등인 이벌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까지는 진골 차지였다.

6두품은 아무리 뛰어나도 제6관등인 아찬,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가 고작이었다.

삼국통일 이후 6두품 이하에 특진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으나 6두품 몫인 아찬의 단계를 구분,4중 아찬까지 올라가게 했을 뿐 진골 몫인 대아찬 이상을 내주진 않았다.

개혁을 내걸었으되 진골 이상의 기득권은 그대로 둔 채 아랫쪽 파이만 나눈 셈이다.

신분 차별 또한 가옥의 방 크기는 물론 섬돌 계단을 1∼3단으로 규제할 만큼 철저했다.

개인의 노력과 성과를 무시한 골품제는 결국 진골끼리의 왕권 다툼과 6두품 이하의 반발을 일으켜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신라가 사라진 지 1072년.이 땅에선 여전히 골품제의 망령이 살아 숨쉰다.

대선이 치러지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누가 되면 누구누구는 진골'이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심지어 '누구는 진골이니 인수위원회에 들어간다' 혹은 '곧 임원이 된다더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일 수 있을진 모른다.

그러나 실력이나 전문성에 상관없이 동향이어서,고교나 대학 동창 혹은 친척이어서 등의 연고에 따라 진골에 6두품 운운하는 건 씁쓸하다.

일에 따라 평가받지 못하고 애써 일해도 어느 날 끈에 따른 진골이 등장하면 뒤로 밀려야 하는 세태는 서글프다.

어느 조직이든 청탁할 일 없으면 권력자의 측근을 찾아 헤맬 것도,그로 인한 성ㆍ진골이 탄생할 일도 없을 것이다.

현대판 골품제가 사라지지 않는한 개혁 운운은 설득력없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