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택 스님 < 해인사 백련암 >

지금 해인사 한 골짜기에 있는 백련암 산자락에는,들녘에는 이내 지고 없는 목련꽃이 화사하고 영산홍 꽃망울들이 고운 자태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부처님 오신날을 전후해 봄꽃들이 만개해 일년에 한번은 볼 만하다.

더불어 수천 수만의 나뭇가지에서 새 잎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초록색들의 앙상블은 우리들을 감탄케 한다. 중생들에게 생기와 희망을 주는 이런 좋은 계절에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우리들은 그리 반갑고 기쁜 것이다.

올 초파일을 맞이하며 우리 마음을 더욱 흐뭇하게 하는 게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님이 성북동 성가정입양원에서 갓난 아기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다.

총무원장 스님이 가톨릭의 복지시설을 방문하고 또 추기경님이 직접 오셔서 맞아 주시니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

총무원의 총무부장 소임을 맡아 처음 맞이한 크리스마스가 1999년이었다.

그 때 처음 조계사 앞길에 '예수님 오심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았다.

종교 간의 대화도 있고,이젠 서로 일정한 소통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해 종무회의에서 의논한 뒤 대로변에 축하문을 내걸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걸려오는 항의전화로 전화통에 불이 났다. "우리 불교가 뭣이 부족해 그러느냐. 기독교에선 꿈쩍도 않는데 조계사에서 축하문을 걸면 또 모를까,종단의 대표기관인 총무원이 나서서 그렇게 할 게 뭐 있느냐?"는 것이 항의의 요지였다. 처음엔 변명조차 통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예수님 오심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조계사 대로변에 내걸고 함께 축하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항의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사찰이 늘어나고,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해주는 성당이나 교회도 늘어났다.

어느 해에는 조계사 대웅전 앞뜰에서 초파일 봉축법요식을 거행하며 각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했는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로 계시던 김동완 목사님의 분향 차례가 됐다.

김 총무께선 주저없이 분향하셨고,나는 참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그후 몇 달이 지나 김 목사님을 만났을 때였다. "원택 스님,나 그때 혼났소. 지난 초파일 행사 때 말이요. 이름을 부르니 안나갈 수 없어 분향했지만 돌아와서 푸짐하게 욕 얻어먹었소." 김 목사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도 이미 겪은 일이라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의 그런 자비가 오늘날 종교들이 화합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지난해 크리스마스엔 조계사 일주문 앞에 웅장하진 않지만 아담한 성탄트리가 모셔졌다. "조계사 주지 스님,혼깨나 나겠네?"하는 기대 반 근심 반의 심정으로 지켜보았더니 조계사 주지 스님은 내내 편안한 얼굴이었고 성탄트리는 끝까지 손상 없이 잘 모셔져 있었다.

2000여년 전 인도 아소카왕이 세운 돌기둥 비문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종교를 존경하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비난해선 안된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도 경의를 표하라. 그렇게 하면 자기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와 다르게 하면 자기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게 되고,다른 종교들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

모두 잘 듣고 다른 사람들이 펼친 교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사실 일반 신자들이 마음을 열고 타 종교를 이해하고 용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먼저 나서서 화합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일 때 신자들도 마음을 열고 타종교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지관 총무원장 스님과 정진석 추기경님이 맞잡은 손과 화합의 미소는 그래서 중생들에게 무한한 힘이 된다.

수많은 갈등과 분열로 고통받는 이 세상에서 종교가 해야 할 일이 이런 것 아닐까.

이 좋은 계절에 부처님이 오신 뜻도 나만의 행복,나만의 진리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