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기술조사센터 발족 ]

63년 1월8일에 열렸던 정.재계 간친회에 대해 좀 더 설명해야겠다.

이원만 삼경물산 사장(코오롱 창업주)의 열변이 끝난 후 이날의 핵심이라고
할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말씀"이 시작됐다.

참석자들은 긴장하면서도 기대어린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박정희 의장은 5.16 직후부터 이병철 삼성창업주와는 수시로 만나 조언을
구했다.

전백보 천우사 사장도 자주 최고회의로 불러 보세가공 등 수출진흥책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일반 경제인들을 그런 기회가 없었다.

박 의장은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여러 경제인들의 고견은 많은 참고가 됐습니다. 금년은 제1차 5개년
계획의 2차년도로서 드디어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해입니다. 경제건설
의 주역은 바로 여기 계신 경제인들인 만큼 오늘 의견은 물론 앞으로의 고견
도 본인은 항시 명심해서 들을 것이고, 또 여러분이 힘껏 경제건설에 이바지
할수 있도록 정부로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박의장의 짤막하고 모범답안식 치사에 대해 경제인들은 약간 실망도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박 의장이 다음날 아침 최고회의에서 경제인협회 대표와 다시 만나
겠다는 언약을 하자 한편으론 고무되기도 했다.

나는 박의장 등 정부 참석자들을 전송한 후 다음날 아침 박 의장에게 건의할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곧 경제인협회 회장단모임을 그 자리에서 조직했다.

물론 박 의장을 "솔깃"하게 만든 이원만 사장도 동행키로 했다.

내 의견은 이미 머리속에 정리돼 있었다.

박의장에게 경제인협회내에 "수출산업위원회"를 설치해 지속적으로 수출산업
진흥을 위한 재반 정책을 정부에 건의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와 같은 구상은 이날 밤 즉흥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나의 뇌리에는 오래전부터 구상의 틀이 짜여져 있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막스 웨버(Max Weber)가 "국가 사회의 근대화
조건들"에서 지적한 대로 이들 조건을 구현할 추진체로서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근대국가. 사회 건설을 위한 조직(기구)"창설이 그것이다.

나는 평소 1884년 김옥균이 이끈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조직"이
없었다는데 있었다고 생각하고항상 아쉬워했다.

이튿날 10시 최고회의 박의장실로 이정림 회장, 이한원 부회장, 이원만
사장 등과 함께 사무국장인 내가 갔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박의장도 우리가 건의한 "수출산업 위원회"에 대해 큰 관심을 표시했다.

앞으로 계속 좋은 시책을 건의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이원만 사장은 기회를 놓칠새라 "박 의장실까지 오는데 검문검색이 심하다"
며 특별히 한 사람을 지정해달라고 건의했다.

박 의장은 그 자리에서 방태순 비서실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로서 경제인협회와 박의장과의 어로는 크게 뚫린 셈이었다.

신년간친회를 마치자 곧이어 나는 경제계와 학계.기술계의 의견교환의 장을
만드는 일을 추진했다.

1월 18일 발족식을 갖게 된 "경제기술조사센터"가 그것이다.

나는 이 구상을 장면 정권 시절인 60년 12월에 있었던 "경제종합회의" 참가
에서부터 키워왔다.

당시 한 경제인이 천우사의 예를 들면서 "보세가공"을 언급했다.

소위 3개년, 5개년 계획 작성에 참가하고 있던 내가 경제일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세가공에 대해 들은 바도 없는 사실이 크게 부끄러웠다.

그런데 나 뿐만 아니라 이 회의에 참가한 정부관리, 경제학자, 기술자들
대부분이 보세가공에 대해 금시초문인 걸 보고 놀랐다.

학계나 기술계는 경제인들이 현장에서 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또 경제인들은 경험을 이론화하고 사회에 알리는 시도가 매우 미흡했다.

이 갭(Gap)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다리를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구상이 경제기술조사센터의 설립으로 현실화 된 것이다.

센터 발족식은 김현철 내각수반을 비롯한 1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반도
호텔에서 성대히 열렸다.

내가 직접 작성한 발족문은 이런 요지였다.

"어느분야를 막론하고 문제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올바른 대책을 수립
하는 것이 향상 발전을 위한 기본요건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학술적인 원리와 실제적인 체험이 협동함으로서 우리 경제가 직면한
과제를 옳게 규정하고, 이에 대응할 "한국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경제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60년대초에 목표로 세운 이 "방안"이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제센터는 그 후 꾸준히 발전해 81년 한국경제연구원으로 탈바꿈해 으뜸
가는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경제센터"가 화려하게 발족한 직후 구두수리
센터, 세탁센터, 미용센터 등 "센터"라는 영어가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