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한인사회에서 주재원 유학생들의 철수는 이제 뉴스거리가 아니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D기업이 사무소를 폐쇄키로 했고 S은행의 누구 누구가
다음달에 한국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식의 달갑지 않은 소식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주재원들은 요즘 자신의 처지를 "사형수"에 빗대곤 한다.

사형수들의 최대관심사가 "다음 형 집행차례가 너냐 아니면 나냐"인 것처럼
소환차례를 불안한 심정으로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어서다.

잔류가 확정된 주재원들이라고 마음이 편한건 물론 아니다.

원화 폭락으로 담배 한값에 9천원, 전철 왕복요금 2만원, 짜장면 한 그릇에
1만8천원. 원화로 환산한 영국 물가가 살인적인 수준이어서 외식하는
주재원 가족들을 요즘에는 찾아볼수가 없을 정도로 돼버렸다.

그나마 해고직전의 운명에 놓인 본사 동료들의 처지에 비하면 자신은
낫다는 점을 위안삼아.

정작 주재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영국인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몇달 전만해도 영국인 못지않은 좋은 외제차를 타고 주말엔 야외로 놀러
다니더니 졸지에 신세가 그렇게 됐느냐"는 조롱반 동정반의 눈초리로
한국인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주재원들의 뱃속을 정말 뒤틀리게 하는 것은 영국인들, 특히 지식인일수록
"철수는 곧 실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D증권사에 근무하는 권모씨는 다음달말 귀국발령을 받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영국인들을 인사차 방문했더니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한결같은
말을 해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회사가 망해 철수하는 것이고 한국에 돌아가면 실직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위기상황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해고당하고 새
직장 얻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영국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주재원들
의 "철수러시"는 이상한 현상인 셈이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파운드를 모아 고국에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귀국을 앞두고 비싼 옷과 가구들을 무더기로 사가는 일부 주재원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인들을 정말 이해못하겠다"는 한 영국인의 지적처럼, 우리사회의
관행 생활습관 등이 정말 문제가 없는지 이제는 곰곰이 따져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성구 < 런던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