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는 민본주의라는 것이 있었다.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서양에서 발달한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민본주의는 덕치사상을 조금 근대화시킨 것이다.

민주주의 또는 민주적 제도에 관해서는 학자들이 여러모로 설명을 하지만,
다음의 이런 생각도 있을수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이 짧은 글의 취지이다.

즉 민주주의는 인간관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동양, 그것도 한국이 포함되는 유교문화권에서는 사람을 둘로
갈라놓기를 좋아했다.

소인과 군자, 선인과 악인, 졸장부와 대장부, 충신과 역신등이다.

서양에서도 중세까지 이와 비슷한 양분법이 없지 않았다.

종교가 정치를 누르고 있던 시대였으므로 신과 악마, 신앙인과 이단자등의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화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이 종교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인간자체에 대한 지각과 관심이 높아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해부도같은 것이 그런 배경을 상징한다.

자연히 인간을 포함하여 사물을 객관화하는 정신이 퍼져 과학문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의 변화도 촉진된다.

사람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또 절대적인 선인도 없고 악인도 없다는 깨우침이다.

사람은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수 있다는 진실을 널리 받아들이게 된다.

정의와 불의도 그렇다.

정의를 덮어놓고 내세우는 이면의 모순과 위선을 알게된 것이다.

그러한 가치의 상대성을 서로 인정하면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려는 차선의
방법이 말하자면 민주제도인 셈이다.

한데 동양에서는 무슨 까닭인지 양분법적 인간관에서좀체 벗어나지를
못했다.

왕도정치와 정의롭고 현명한 "엘리트"의 통치를 정치적 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 정의 덕과 같은 명분만으로는 살수 없는 것이 세간사이다.

중국인은 의뭉하게도 명분과 실제를 구분하는 이중구조를 "사회적계약"으로
치부했다.

일본 역시 "혼네"(속사정)와 "다테마에"(내세우는 주장)를 융통성있게
다루었다.

조선사람은 너무 "순진한"탓인지 명분과 실제간의 어긋남을 참지 못했다.

적어도 보통 백성들은 세상살이가 그런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양반"들은 애써 모른체하거나 속으론 알면서도 명분 의리 정의를
내방식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어쩌면 그게 힘이되어 수백년을 버텨왔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조선사람의 "순진함" 혹은 관념지향성을 나쁘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자, 오늘날의 사정은 어떤가.

민주화라는 대의와 정의는 실현된듯이 보인다.

실현된듯이 보인다고 한것은 여전히 형식과 내용, 명분과 실제간에 괴리가
남아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무엇무엇만 되면 해결된다, 발전된다 라는 진보 분절법을 즐겨한다.

해방만 되면 된다,통일만 되면 된다, 또 작게는 무슨 관청을 만들면 된다,
제도를 고치면 된다 등등.

사실은 관념의 포로가 된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공산주의가 망한 근원도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절대주의의 반대인 상대주의이며 자기가 신봉하는 가치를
남에게 강요할수 없다는 객관정신에서 싹튼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만이 공평하다고 믿는 것이, 이를테면 자유시장경제의 사상
이다.

돈을 버는데는 악인도 선인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만 옳다고,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것이 성숙한 "선진국"으로
가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