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이라면 우선 그의 국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떠올리게 된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조선조후기의 실학파문학에 이르는 국문고설사의
중간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던게 그의 우뚝한 업적이다.

그가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한적함과 근심을 덜어 주고자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는 "구운몽",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
했을때 숙종의 혼미한 마음을 되돌리고자 썼다는 "사씨남정기"는 그가
후세에 남긴 불후의 작품들이다.

그가 이 소설들을 국문으로 집필하게 된 동기는 "국문가사예찬론"에서
확인된다.

그는 우리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로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가타고 하면서 한문을 "타국지중"으로 규정하고
정철의 "사미인곡" 등 한글가사를 굴원의 "이소"에 견주었다.

이러한 국학의식은 당시로선 그의 진보적인 사상을 표출시킨 탁견이었다.

그는 봉건질서가 무너져가는 시기를 산 것도 아니고 또 봉건질서의
반대진영에 선 신분계층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는 명문대가의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국문소설을 쓰고 국문가사를 예찬했다는 것은 특기할만 일이
아닐수 없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자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령공 익겸의 유복자이고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로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의 숙부였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방의 증손녀
이고 이조참판 지의 딸인 해평 윤씨였다.

이러한 가통과 어머니의 남다른 희생적인 가르침은 그의 생애와 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궁색한 살림인데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하는데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고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 관리로부터 서책을 빌려다가
손수 필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소학 사략" "당율"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명문 출신답게 14세에 초시,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9세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 수찬 교리 동부승지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으로 관직에서 탄탄대로를 걸었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두번째 유배를
당해의 경남 남해의 상소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부는 국문학사에 우뚝한 그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고자 그를 1월의
인물로 선정하고 갖가지 추모행사를 벌이게 된다.

모쪼록 뜻있는 한달이 되길 빌어 마지 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