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10월 제정프러시아때의 일이다.

베를린 거리에서 나이든 한 프러시아군 대위가 병사들 앞으로 거만한
태도로 걸어왔다.

그는 시 외곽의 쾨페니크시로 가는 버스를 정차시키더니 병사들에게
그 버스에 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쾨페니크에 도착하자 그 병사들을 이끌고 시장실로 들어갔다.

대위가 "시장,당신을 체포하오"라고 소리치자 그에 질린 시장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체포영장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체포영장? 내가 거느리고 있는 이 병사들이 바로 체포영장이야"라고
그는 일갈했다.

자신도 예비역 장교였던 시장은 대위의 군모에 붙은 배지가 거꾸로
달렸고 낡은 것이라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위는 시회계담당관에게 금고에 있는 현금을 인도하라면서 영수증을
떼어주었다.

현찰은 고작 4,000마르크였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 곳을 지키라고 명령한 뒤 돈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전과가 있는 빌헬름 포이크트라는 구두수선공이었던 그는 그로부터
10일뒤 당국에 체포되어 4년간의 금고형을 언도받았다.

관명을 사칭한 그의 대담한 사기행각은 엉뚱하게도 대중의 동정심을
유발시켰다.

황제는 그가 형기의 반을 마쳤을 때 사면을 해주었다.

또 그는 부자미망인이 제공한 종신연금으로 룩셈부르크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까지 했다.

당시 제복이라면 덮어놓고 존경해 마지 않던 프러시아인들의 권위주의적
기질에 교묘하게 편승하여 행해진 범죄였다.

그의 행각이 만화가들의 풍자주제로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만 보더라도
프러시아인들의 권위주의적 특성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었는가를
알수 있게 해준다.

한국에서도 정부 수립이후 최고권부인 경무대나 청와대의 고위층을
사칭하거나 친분을 빙자한 사기행각들이 자주 일어났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과거의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는 그러한
범죄가 횡행할수 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권위주의적인 유산을 청산하겠다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도
청와대를 사칭한 사기사건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일말의
실망을 떨쳐버릴수 없다.

청와대의 여전한 권력집중현상이 사안을 법 이전에 권력의 힘으로
밀어붙여 보려는 국민의 후진의식과 상승작용을 하여 결과해 낸
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