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작품을 놓고 그것이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름난 예술작품중에서도 분명히 외설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에로틱한
것이 많다.

D H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당시의 도덕적 질곡에 대한 공격으로
인정돼 외설의 누명을 벗은지 오래다.

10대 소녀와 사랑에 빠진 병든 남자의 열정을 그린 블라디미르 나바코프의
소설 "롤리타"도 외설혐의를 벗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 "침묵"에는 수많은 베드신이 나오지만 그 작품을
외설이라고 매도하는 사람은 없다.

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선율에는 성적인 묘사가 들어있으나 이
곡을 외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예술작품의 소재로는 외설적 요소도 엄연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외설을
에로틱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장인의 솜씨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된다.

예술은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작품을 압도하는
주제가 되어서는 안되고 보다 높은 가치의 맥락속에 자연스레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폴란드의 미학자 스테판 모라브스키는 작품속에서 성적 요소들은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시화, 지성화, 미화되어 용해되어 있을
때 그 작품이 거부감없이 예술로 받아들여질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성적인 요소가 목표가 될수는 없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음악과 조명으로 꾸며져 예술적 속성을 지닌 스트립쇼
라고 해도 그것이 결코 예술이 될수 없는 것은 그 목표가 관객을 성적 황홀
경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국은 최근 공연돼 짙은 외설성때문에 물의를 빚었던 연극"미란다"를
사법처리할 방침을 세우고 이 연극의 음란성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보완수사를 벌이고 있다.

"표현영역의 확대"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외설의 횡행은 막아야 한다.

외설이 기승을 부리면 예술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오고 만다.

그러나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만 발전해갈수 있는 예술의 속성에 비추어
사법처리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관객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예술을 격하시킨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예술이 타락한 시대는 언제나 타락한 예술가들이 이끌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