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3년 목포상업학교 졸업을 앞두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의 전신)
신입행원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 보다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조선은행에 취직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직"이라기 보다도 차라리
"출세"의 개념이 더 강했다. 또한 일제의 만행이 날이 갈수록 더 험악해져
마구잡이식 학도명 차출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취업의 길을 선택할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입행경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런 경쟁을 거쳐
합격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1백12명이었다. 물론 나도 당당히 합격했다.

대학졸업자들도 번번이 낙방하는 판에 상업학교 재학중에 그 좁은 관문을
뚫었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기쁨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1994년1월10일 나는 드디어 조선은행 본점영업부로 발령을
받았다. 이로써 나는 청운의 꿈을 안고 금융계에서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소정의 연수를 마치고 처음으로 배치받은 부서는 외환계였다.

외환계에 부임하여 얼마되지 않았을때에 나는 전화를 받는 과정에서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질러 사무실을 웃음바다로 만든적이 있다. 당시 시골에서는
벽걸이식 전화를 쓰고 있었다.

시골에서만 생활해온 내가 좌식전화를 처음 사용하는 과정에서 빚어낸
일종의 헤프닝이었다.

좌식전화기가 익숙할리 없었던 나는 그만 구화구에 입을 대고 "모시모시"
를 연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사무실안은 이내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내 첫 봉급은 86원이었다. 굉장히 많은 액수였다. 그무렵 한달 하숙비가
8원에서 10원이었고 순사월급이 33원이었다.

그리고 군수월급은 80원이었다. 그래서 봉급을 받으면 하숙비와 얼마간의
용돈을 챙겨놓고 고향의 부모님께 상당한 돈을 꼬박꼬박 부쳐드릴수 있었다.

서울생활을 통하여 나는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되었다. 돈많은 서울부자들의
이야기와 남대문시장안의 도매상과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무역상
이야기는 내게 적지않은 자극을 주었다.

당초 거상의 포부를 안고 있었던 나는 새로운 세계, 사업의 세계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게 되었다.

어떻게하면 거상이 될수 있을까.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마음놓고 손댈
사업이 마땅치 않았고 조선은행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업의 기회를 찾는것이
상책이라고 파단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선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날이갈수록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중국에대한 기대와 동경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44년 10월 중국 상해지점에 파견할 행원을 찾고 있던 인사 담당 책임자가
중국행에 대한 의향을 타진해온 것이다. 연수기간에 중국어 시험에서 2등을
했기 때문에 내가 중국에 파견할 행원으로 첫손가락에 꼽혔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꼭 가보고 싶었던 중국이었다. 대륙에 가서 새로운 문물과
접하고 사업이 될 만한것을 찾아보고 싶은 야망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는 완강하셨다.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싸움터에 자식을 선뜻 내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부모님께 나의 포부를 분명히 밝혔다. 사나이
대장부라면 더 넓은 세계, 다른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세계에도 가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의 첫번째 중국 근무결심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고 그대신
광주지점으로 전근발령을 받았다. 광주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나는 주말이
되면 꼭꼭 집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기회있을 때마다 중국행의 의지를
말씀드리곤 했다.

나의 초지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려 3개월동안 중국근무를 허락해
주도록 간청하는 나의 끈질긴 설득에 부모님도 어쩔수 없다는 듯이 나의
뜻을 받아들여 주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45년1월 서주지점으로 전근 발령을 받았고 드디어
대만의 중국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중국은 역시 광활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그 광활한 평원을 바라
보면서 나는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곳에서
큰 꿈을 펼쳐보리라 다짐했다.

광주를 떠난지 장장 18일만에 서주에 도착했다. 짐작한대로 서주지점에는
우리 조선인 행원은 한사람도 없었다. 16명의 지점직원 가운데 우리동포가
한사람도 없으니 외롭기 짝이 없었다.

부임한지 5개월가량 지나자 이제는 제법 중국생활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휴일이면 교외로 놀러나가 중국의 농촌을 돌아보기도 했다. 중국의
들녘은 넓기만 했다.

고향에서 어린시절을 보낼때에는 나주평야가 세계에서 가장 넓은줄
알았었다. 그러나 중국에 와보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목포상업학교에
다닐때 중국인 왕선생님으로부터 중국이 넓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실제로 와서 직접 두눈으로 살펴본 중국은 정말 큰 대륙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편 일제는 그해 6월에 접어들면서 최호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징병을 확대하는 한편 소위 "현지소집"이라는 이름아래 직장 청년들
까지 징집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45년 6월초 나는 서주에서 이른바 "현지소집"이라는 미명아래 일제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다른방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나는 남경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65부대로
끌려가게 되었고 서주에서의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