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국부를 흩트리는 일
한여름 밤이면 평상(平床)에 둘러앉아 부채 하나로 더위를 이겨내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요즘은 기후변화 때문인지 무더위가 훨씬 더 극성으로 느껴진다. 여하튼 더위로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열대야는 대단한 고통인데, 밤에도 기온이 섭씨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인체의 체온 조절 기능이 비상상태로 접어들기에 잠을 설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1902년 7월16일, 뉴욕은 열대야였다. 수많은 사람이 무더위에 뒤척이고 있을 때, 25세 청년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 1878~1950)는 밤을 지새우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하나의 설계도가 완성됐는데 그것은 바로 에어컨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당시에 가장 잘나가던 대기업 GE에 취업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꿈을 이뤘다면 최근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 제일 에어컨 제조업체 ‘캐리어 엔지니어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회사는 캐리어가 1915년에 설립한 회사다.

캐리어가 취업해서 처음 맡은 일은 컬러 인쇄기의 트러블 해결이었다. 그 무렵, 예를 들어 빨강과 검정 두 가지 색을 사용하는 경우라면 종이 위에 두 번을 별도로 인쇄했는데, 실내 온도나 습도에 따라 종이 길이가 변하므로 색상이 겹치는 문제가 여름철엔 자주 발생했다. 캐리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내 온도와 습도를 항상 균일하게 유지하는 에어컨을 개발한 것이다.

에어컨이 도입되면서 다른 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특히 서비스업과 문화산업은 계절과 관계없이 번창했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극장이나 공연장은 여름철이면 당연히 폐쇄되는 공간이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열대지역 국민도 편히 살 수 있게 해준 에어컨을 최고의 발명품이라 극찬했는데, 미국 공학한림원이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며 선정한 ‘인류의 삶을 바꾼 스무 가지 위대한 발명’에서도 에어컨은 열 번째에 랭크된 바 있다.

위의 스무 가지에서 첫 번째, 즉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꼽힌 것은 전기(電氣)였다. 에어컨도 전기가 있어야 돌아가듯 전기는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근육이자 신경이며 따라서 전기를 만드는 일, 즉 발전(發電)은 국가의 으뜸가는 기간산업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발전량의 약 3분의 1을 원자력이 맡고 있는데, 최근 이를 마치 재앙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원자력 발전은 앞서 이야기한 스무 가지 위대한 발명에도 포함된 인간의 지혜가 빚은 매우 정치(精緻)한 기술이다. 그런데 잘 아는 바와 같이 원자력의 힘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 살상용 폭탄으로 처음 사용됐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공포와 기피 대상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인류문명은 경쟁 속에서 발전했으며 가장 혹독한 경쟁, 즉 전쟁을 통해 도약해온 것이 사실이다. 청동기를 쓰던 인류가 철기시대에 진입한 것도 좀 더 단단한 쇠붙이로 칼과 창을 만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

쇠붙이로 제일 먼저 만든 것이 칼과 창이라고 해서 이를 멀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쇠붙이로는 칼도 만들지만 호미도 만들 수 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과학기술자들은 원자력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은 벌써 60년 넘는 연륜의 산업이다. 기술력을 믿지 못하면 수만 개의 부품이 움직이는 비행기를 어떻게 탈 수 있는가? 항공기는 부품 하나만 잘못돼도 엄청난 사고가 나지만, 그런 경우를 최대한 대비하는 것이 기술이다. 항공기를 포함해 초고속철도, 초고층 건물, 그리고 원자력 등 극한, 첨단, 거대기술은 모두 위험성을 지니고 있으며 완벽한 것은 없다. 더욱 안전한 원자력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반핵(反核)단체들의 감시활동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이를 통째로 멀리하는 것은 문명에서 멀어지는 일이며 결국 국부(國富)를 흩트리는 일이다.

김도연 < 포스텍 총장 dohyeonkim@postech.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