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 한여름, 고두현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태헌의 한역】 盛夏(성하) 聞說南方霖雨連(문설남방임우련) 仍慣欲打問候電(잉관욕타문후전) 嗚呼今卽親不存(오호금즉친부존) [주석] * 盛夏(성하) : 한여름. 聞說(문설) : 듣자 하니 ~이라 한다, ~라고 듣다. / 南方(남방) : 남쪽, 남녘. / 霖雨連(임우련)...

  • 쌍계사 벚꽃길, 절대로 혼자 가면 안 돼. 밤에는 더욱…

    쌍계사 십 리 벚꽃·2 고두현 쌍계사 벚꽃길은 밤에 가야 보이는 길 흩날리는 별빛 아래 꽃잎 가득 쏟아지고 두 줄기 강물 따라 은하가 흐르는 길 쌍계사 벚꽃길은 밤에 가야 빛나는 길 낮 동안 물든 꽃잎 연분홍 하늘색이 달빛에 몸을 열고 구름 사이 설레는 길 쌍계사 벚꽃길은 둘이 가야 보이는 길 왼쪽 밑동 오른쪽 뿌리 보듬어 마주 잡고 갈 때는 두 갈래 길,...

  • 추사가 눈 속의 수선화를 시로 읊은 까닭은

    수선화(水仙花) 추사 김정희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겨울 제주에 와서 수선화 꽃밭에 들었다. 희고 노란 꽃무리가 구름 같다. 한림공원에는 혹한을 견딘 수선화가 50여만...

  • 높은 곳에 오르면 잘못을 빌고 싶어지는 이유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고두현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간다, 하고 빼곡이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용평 ...

  • 새해 아침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첫 마음 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

  • 그 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한겨울에 음미해 보는 하이쿠 2수 찬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 (しぐるや我も古人の夜に似たる)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うづみ火や我かくれ家も雪の中) -요사 부손 일본 3대 하이쿠 시인 요사 부손(與謝蕪村·1716~1784)은 오사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해서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 일본 북동부 지방 등...

  • 책으로 나왔어요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연재하는 중에도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책으로 엮어내고 보니 더욱 정감이 가고 애틋하기도 합니다. 책 제목은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입니다. 벌써 예스24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네요. 따뜻한 연말 선물로도 좋을 듯합니다. ㅎㅎ 서문 중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우리 함께 천천히 음미해 봐요. “시를 읽으면 뭐가 좋아요?” 이...

  • 홍시 속살 같은 서해 노을- '만리포 사랑'

    만리포 사랑 고두현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서해대교 위에서 홍시 속살 같은 노을을 만났다. 부드러운 노을이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익어가는 풍경. 늦게 떠난 여행길을 행복하게 색칠해준 첫 번째 화폭이었다. ‘만리포 사랑’ 노래비가 서 있...

  •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 그래도 가끔은 전화번호를 눌러 보자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은 길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짧게 그 상황만 묘사하면 이렇다. 외환위기 때 어머니 먼 길 떠나시고, 이듬해 여름 어느 날. 남부 지방에 큰비 오고 장마 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경남 지역번호 055를 누르고, 다음 번호를...

  • 레몬꽃 피는 그 나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미뇽 괴테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도금양은 고요히, 월계수는 높이 서 있는 나라? 그곳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들이 ...

  •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바람난 처녀 고두현 남해 금산 정상에서 산장으로 내려가다 화들짝 돌아보니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얼레지 한 무더기 칠 년 전 저 길 오늘처럼 즈려밟고 가신 어머니 수줍은 버선코.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바람난 처녀’로도 불린다. 남해 문학기행을 여러 해 다녔다. 10여 년 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바다는 마르면 바닥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 알 수 없네

    이런저런 생각(感遇) 두순학 큰 바다 파도는 얕고 사람 한 치 마음은 깊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네. 大海波濤淺, 小人方寸深. 海枯終見底, 人死不知心. 두순학(杜荀鶴·846~907)은 당나라 후기 시인이다. 시인 두목(杜牧)의 막내아들(열다섯째)이라 하여 두십오(杜十五)라고도 불렸다. (두목은 ‘산행’...

  • 대동강 물 언제 마르나, 이별 눈물 해마다 보태거니

    임을 보내며(送人) 정지상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꼬,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거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고려 최고 서정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의 절창이다. 시 제목은 《동문선(東文選)》에 ‘송인(送人)’으로 기록돼 있지만 《...

  • 조선시대 얼음 서빙고에만 13만여 개 보관

    얼음 캐는 이들을 위한 노래(鑿氷行) 김창협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천만 사람 우르르 강 위로 나왔네. 쩡쩡 도끼 휘두르며 얼음을 찍어내니 울리는 그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층층 얼음 설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그 음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에 저장하고 밤마다 망치 들고 강에 또 모이누나. 해 짧은 겨울 밤 늦도록 일...

  • 윤동주 100번 째 생일날 읽는 생애 마지막 시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

  • 늦게 온 소포를 받고 밤새 잠들지 못한 그날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

  • 이태백도 이 시 앞에선 붓을 던졌다

    황학루(黃鶴樓) 최호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났거니 이 땅에 황학루만 덧없이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고 오지 않는데 흰 구름은 느릿느릿 천년이어라. 한양 숲 또렷이 맑은 물에 어리고 앵무주 가득 메운 꽃다운 봄풀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메뇨 연파(煙波) 이는 강 언덕에 시름겨워라.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

  •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

  • 그들이 미라보 다리에서 만난 까닭은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