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8개 한눈에 읽죠"

지난 5일 오후 2시30분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영업부 2층 외환 딜링룸.출입문 맞은편 벽에는 전 세계 환율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시세판의 숫자가 수시로 바뀌고,책상 앞의 모니터들을 지켜보는 딜러들의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날카롭다. '도대체 딜러가 몇 명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딜링룸 전체를 살펴보니 창쪽에 앉은 딜러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순간의 선택이 큰 손익을 가름하는 진검 승부의 현장 치고는 좀 평온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뿐.곧 딜러들 간에 암호 같은 말들이 잇달아 오간다.
[생생 인터뷰] 외환은행 선임딜러 김두현 차장 "천당·지옥 오가는 0.5초의 승부"
"60 솔드(Sold)!" "11원!" "3.5 2개 보트(Bought)." "몇 개라고?"

이렇게 짧은 대화로 거액의 외환거래가 이뤄지는 모양이다.

"5분 남았습니다. "

원 · 달러 데스크의 보조딜러가 안내 멘트를 날린다. 장이 끝나는 오후 3시가 가까워지자 주문이 몰리기 시작한다. 거래를 총 지휘하는 김두현 선임딜러(차장)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묻어난다. 오전에 크게 하락한 환율이 오후 들어 반등하면서 막판에 달러를 사 달라는 기업들의 요청이 밀려들었다.

"33만불 솔드!" "80만불 솔드!"

김 차장을 마주하고 앉은 '코퍼레이션(Corporation) 딜러'들이 앞다퉈 외친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김 차장도 "2.5 던(done)!"이라며 짤막하게 응수한다. 코퍼레이션 딜러는 은행의 기업 고객들을 위해 달러 매매를 중개하는 브로커다. 김 차장은 이들의 주문을 모아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고 판다. 기업들이 달러를 사 달라고 하면 해당 기업을 맡은 코퍼레이션 딜러는 김 차장에게 매수 주문을 낸다.

'80만불 솔드'란 기업의 요청을 받은 코퍼레이션 딜러가 김 차장으로부터 80만달러를 사겠다는 뜻.이는 김 차장 입장에서는 파는 게 되므로 '솔드(Sold)'라고 표현한다. '2.5 던'은 김 차장이 해당 물량을 달러당 1312.5원의 가격에 팔겠다는 의미다. 가격 결정권은 물론 김 차장이 행사한다. 의사결정은 거의 0.5초 만에 이뤄진다. 한순간의 판단 미스는 곧바로 적게는 수백만원 많게는 수억원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김 차장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장 마감됐습니다. 오늘 종가는 1313.5원입니다. "

보조딜러가 마감을 선언하자 물부터 한 모금 마신 김 차장은 그제서야 취재진을 돌아보며 악수를 청했다.

▼오늘 장은 어땠습니까.

"오전에는 1300원 선이 무너지는 등 예상 밖의 폭락으로 손해를 좀 봤는데 그나마 오후에 반등하면서 다소 만회했습니다. 위 아래로 변동폭이 30원이 넘어 오늘 대박을 낸 딜러는 아마 없을 거예요. (웃음)"

▼요즘 스트레스가 많으시겠어요.

"오늘은 조용했던 편입니다. 환율이 미친 듯이 날뛰었던 작년 9월부터 연말까지는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쌓인 피로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최근에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까지 졌지요. "(김 차장이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지난 연말에 하기로 했던 인터뷰가 새해로 미뤄졌다. )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오늘 얼마를 벌었는지 장이 끝나면 바로 나오니까 그게 가장 힘들죠.매일 성적표에 따라 기분도 극과 극을 오가니까요. 손실이 나거나 일정 기간 마이너스가 쌓이거나 하면 정말 힘들어요. 매도 포지션을 크게 잡아놨는데(즉 고객 요청 등으로 사야 할 달러가 많은데) 갑자기 북핵 실험과 같은 예기치 못한 뉴스가 발생하면 환율이 급등해 큰 낭패를 보게 되지요. 하지만 반대로 시장상황이 제가 예측한 대로 흘러가 목표한 수익을 달성하면 그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

▼실적이 좋으면 보상도 해주나요.

"일반 직원들보다 많은 인센티브가 있죠.하지만 어마어마한 액수는 아니고요,고생에 대한 보너스 정도라고 보면 돼요. 외국계 은행에선 상당히 많은 인센티브를 준다고 들었습니다. 연봉의 3~4배를 챙기는 딜러도 있다고 해요. "

▼점심도 제대로 못 먹는다면서요.

"제 새해 다짐이 '김밥을 먹지 말자'입니다. 10~15분이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워요. 점심시간에는 고객의 오더와 거래량이 줄기 때문에 시장의 유동성이 축소됩니다. 이럴 때는 크지 않은 물량으로도 장이 급변할 가능성이 있어 자리를 못 비워요. 그러다 보니 김밥이나 라면,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죠."

2000년에 외환딜링룸에 온 김 차장은 지금까지 원 · 달러 트레이딩만 맡아왔다. 유로 · 엔 · 위안화 등 이종 통화 간 거래나 선물환 거래 등 다른 유형의 거래도 일정 기간씩 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는 좀 특이한 경우다.

그는 날마다 오전 8시쯤 출근하자마자 뉴욕 금융시장부터 체크한다. 블룸버그 시황이나 로이터 등 해외 언론의 분석기사,해외 딜러가 보내오는 코멘터리 등을 검토하며 당일 전략회의도 갖는다. 그 다음 장이 열리는 9시부터 6시간은 화장실도 참고 또 참아서 갈 만큼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모니터 앞을 지켜야 한다.

▼책상 앞에 모니터(정보단말기)가 많던데 바쁜 시간에 그걸 다 볼 겨를이 있나요.

"블룸버그 · 로이터 · 인포맥스 · 메신저 등 딜러당 보통 7~8개의 모니터가 책상 앞에 놓여 있습니다. 숙련된 딜러라면 이들 모니터를 한눈에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뜨는 정보를 놓치고 거래하면 시력 나쁜 사람이 안경 벗고 운전하는 거나 다름 없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이젠 한번 쓱 보기만 해도 웬만한 건 다 눈에 들어옵니다. "

▼딜러로서 견지하는 원칙이 있나요.

"저는 '잔물결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제1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전에 시장상황을 숙지한 다음 미리 저만의 가격 범위(Range)를 설정해 그때까지 1시간이 됐든 1주일이 됐든 참고 기다리는 전략을 쓰죠.물론 요즘처럼 변동성이 심할 때는 은행의 규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손절매(Stop-Loss)하는 경우도 많지만요. 어쨌든 지금까지 잘리지 않고 있는 건 많이 안 깨졌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웃음)"

▼외환 당국이 인위적으로 개입할 땐 손해를 보기도 하겠네요.

"당국의 개입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지난 연말 정부가 기업들의 장부상 환손실을 줄이기 위해 환율을 떨어뜨린 것처럼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개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년 7월 거래가 한산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70억달러를 한번에 풀어 시장을 거의 아노미 상태로 만들었던 일명 '도시락 폭탄'식 개입은 정말 딜러들에겐 악몽과 같은 일이죠."

▼외환 딜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요.

"전 승부 근성과 순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금융지식과 이론을 풍부하게 갖춰도 빠른 시간에 판단하고 매수 · 매도 결정을 못하면 무용지물이니까요. 모니터를 보고 거래 버튼을 누르는 데 0.5초를 넘기면 곤란해요. 이 '0.5초의 승부'는 거래금액이 클수록 리스크(위험)도 커지기 때문에 순간 판단이 정말 중요합니다. 패기와 승부근성,시장의 경험이 있어야죠."

▼딜러는 몇이나 되나요.

"70~80명쯤 됩니다. 저는 원 · 달러 데스크 소속인데 채권,기업어음 · 자금,옵션 · 금융공학팀 등이 함께 있거든요. "

▼외환시장 관련 사진으로 매스컴을 가장 많이 탔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제 표정이 신문에 난 사진만큼 심각한 줄 몰랐어요. 모니터에 집중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오나봐요. 처음에는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옆에 있으면 신경이 좀 쓰였는데 지금은 개의치 않고 일해요. 기사를 본 지인들로부터 전화도 많이 받았고,오래 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과 반창회까지 한 적도 있어요. "

▼언제까지 딜러로 일할 생각입니까.

"아직까지 그만둘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30대가 외환 딜러로서 전성기라고 하지만 국내에도 40대 중 · 후반까지 건재한 분들이 많고 외국계 은행에는 50대 딜러도 있어요. 아마 체력이 닿는 한 계속 하지 않을까 싶어요. "

김 차장은 "정해진 룰만 지키면 다양한 전략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외환 딜러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퇴근 후 집에서도 인터넷을 켜놓고 해외 시장 동향을 점검할 만큼 스트레스와 함께 산다는 그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글=이호기 · 서화동/사진=김병언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