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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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관계가 충돌하면 규제개혁이 멈춰서는 것도, 기존 질서에 순응하라는 ‘타다 금지법’이 등장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혁신성장’은 ‘혁신이 주도하는 성장’을 줄인 말이 아니었다. 혁신성장은 ‘포용성장’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돼 있다. ‘혁신적 포용국가’ 구호를 봐도 혁신은 포용 안에서만 용납된다. 혁신과 포용이 부딪치면 결론은 정해져 있다.

성장에 포용을 갖다붙이는 순간 현실은 이렇게 돌아간다. 포용성장과 그렇지 않은 성장으로 갈라지고 혁신의 색깔도 달라진다. 포용성장 설계론자들이 “혁신은 기존의 이해관계를 깨는 것”이라면서도 “취약계층의 이해와 기득권층의 이해는 다르다”고 말하는 게 그렇다. 얽히고설킨 경제에서 취약계층의 이해와 관계없는 혁신은 없다.

이런 식이면 전 계층,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4차 산업혁명을 하자는 것은 헛소리가 되고 만다. ‘인공지능(AI) 국가전략’ 또한 포용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좌절을 겪을 게 뻔하다. 실행이 안 되는 ‘정책 과잉’이다.

혁신에 대한 이분법은 역사까지 망각하게 한다. “어떤 이들은 산업혁명을 노동계급에 악몽 같은 시절로 묘사한다. 진실은 상상력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상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빠르게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다.” 폴 존슨의 《근대의 탄생》에 나오는 대목이다. 혁신이 성장은 물론 분배도 개선한다는 실증연구는 많다. 취약계층을 어렵게 하는 혁신은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혁신이 취약계층에 이동의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2%대 후반의 경제성장률로도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착한 성장’이라고 말했다. 소득주도 성장, 공정경제는 착한 성장을 위한 수단이었다. 결과는 보고 있는 그대로다. 한국 경제는 1%대 성장률을 위협받는 상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장이 사라지면 경제적 약자는 더 어려워지고 사회문제 해결은 더 멀어진다.

‘착한 중소기업’, ‘자상한 대기업’도 위험하다. 밑바탕에 깔린 출발점은 기업의 이윤 동기를 뒤흔드는 ‘반(反)기업 정서’다.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기업이 아무리 착하고 자상해도 시장에서 생존하고 성장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냉정하기 짝이 없는 글로벌 경쟁에서는 통하기 어려운 기업 구분법이다.

‘좋은 일자리’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정규직은 맞고 비정규직은 틀리다’는 이분법은 다른 얘기다. 최저임금의 인상처럼 기업이 감당 못하면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장 수요에 따라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일자리를 막고 세금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성공한 경제는 없다.

‘따뜻한 금융’은 금융이 ‘산업’인지 ‘복지’인지 헷갈리게 한다. 정부가 인증하는 ‘건전한 벤처’는 혁신생태계를 왜곡하고 있다.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는 재생에너지의 거품과 멀쩡한 원전산업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는 말은 틀렸다. 이것은 선의가 아니다. 형용사로 뒤덮은 ‘기만’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데이터와 증거 기반의 분석을 얼어붙게 하고, 규제와 친구처럼 어울리는 게 형용사의 마법이다.

[안현실 칼럼] 경제정책에서 '형용사' 걷어내라
‘모두가 다 함께 잘사는 혁신적 포용국가.’ 이 정부가 내세운 비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성과가 왜 빨리 안 나오느냐고 묻는다. 경제는 경제다. ‘성장’, ‘혁신’, ‘기업’ 자체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는데 경제가 살아날 리 없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의 한 연구는 리더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의심해야 할 유형을 제시한 바 있다. ‘나’ 아닌 ‘우리’를 강조하고 수식어를 남발하는 리더는 조심하라고 말한다. 책임 회피와 무능력의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