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국적인 김범석 쿠팡 창업자(이사회 의장)를 그룹 총수 격인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외국인을 국내 규제 그물망에 포함시키는 첫 사례여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노조, 시민단체 등은 김 의장이 쿠팡의 ‘실질적 지배자’라며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다. 재계에선 에쓰오일, 한국GM 등 외국계가 대주주인 기업 사례를 들어 전례 없는 규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쿠팡그룹, 김범석 총수’ 지정 검토를 둘러싼 쟁점을 짚어 봤다.

공정위는 오는 30일 쿠팡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자산 규모가 5조원을 넘어선 기업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 쿠팡의 지난해 자산은 50억6733만달러(약 5조7000억원)에 달한다. 자산 기준에 따라 쿠팡의 대기업집단은 예정된 수순이다.

관건은 김 의장의 동일인 지정 여부다. 공정거래법상 동일인은 그룹 총수를 말한다. 지정되면 총수의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과 배우자가 공시 의무대상이 된다. 다만 15세 때 미국으로 이주한 김 의장의 국적이 미국이고 미 증시에 상장한 회사 주요 주주가 동일인 지정 대상이 되느냐가 쟁점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최혜국 대우 조항을 위반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범석이 쿠팡 총수, 국감 받아야" vs "외국인 총수 전례없다"

정무적 판단에 맡겨진 ‘쿠팡 총수’ 결정

당초 공정위는 쿠팡을 ‘총수 없는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하는 방안에 무게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말 기준(약 5조7000억원) 자산 5조원을 넘어선 쿠팡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분류하되, 총수는 지정하지 않는 안으로 잠정 결론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류가 바뀌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실 관계자는 “공정위 실무팀은 외국인 대주주를 동일인으로 지정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무팀 의견보다는 ‘윗선’의 정무적 판단이 더 중요한 시점인 것 같다”며 “이번주 중에 다각도로 검토한 후 위원장에게 보고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김범석 총수’ 지정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이 거센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쿠팡그룹의 총수를 지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몇몇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노조와 여러 소비자단체가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국정감사 등에 부르려면 그룹을 대표하는 총수로 지정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맞다”고 전했다.

고민 깊어지는 공정위

공정위 내부에선 이와 관련해 ‘함구령’이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민감한 이슈인 만큼 30일 최종 발표 전까지 언론 등 외부 기관 질의에 응대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공정위의 최대 고민은 김 의장을 최대주주로 볼 수 있느냐다. 쿠팡이 미 증권거래위원회에 보고한 S-1 신청서에 따르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쿠팡Inc의 최대주주는 소프트뱅크비전펀드(SVF, 지분율 33.1%)다. 김 의장은 10.2%를 보유하고 있어 네 번째 주주다. 이에 따르면 ‘쿠팡그룹’의 총수는 SVF를 운영하는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혹은 SVF의 최대 투자자인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여야 한다.

그럼에도 공정위 일각에선 김 의장을 실질적 지배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미국 상장사에 적용되는 차등의결권 제도 덕분에 김 의장이 이사회에서 차지하는 의결권 비중이 76.7%에 달하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김 의장을 총수로 지정해야 한다는 공정위의 핵심 논리 중 하나는 국내 기업과의 형평성”이라며 “한국에 없는 차등의결권을 들어 동일인을 지정하면 공정위가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칫 외국 기업의 대(對)한국 투자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공정위로선 부담이다. 외국 기업이라도 자산 5조원 이상 규모로 성장하면 공정위의 ‘규제 그물망’에 들어가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법조계에선 쿠팡이 한·미 FTA 최혜국 대우 조항을 근거로 강하게 반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미 FTA 투자 규정에 따르면 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할 때 같은 상황의 제3국과 비교해 불리한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며 “에쓰오일의 경우 최대주주인 아람코를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았는데 쿠팡에 대해선 미국인 대주주를 동일인으로 지정하면 미국무역대표부(USTR)로 이 사안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휘/이지훈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