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전 40승 5무승부 무패.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과 맞서 이순신 장군이 거둔 전과입니다. 40여 회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불멸의 기록입니다. 일본군 함대 70여 척을 거의 전멸시킨 한산도 대첩,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무찌른 명량해전, 적선 400여 척을 격파한 노량해전까지 조선의 바다엔 이순신이 있었습니다. 육지에선 패배를 거듭하고, 임금은 일본군에 쫓겨 명나라 국경까지 도망간 상황. 이순신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장군이 거둔 연전연승의 비결을 한산도대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장군의 마을 잔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3월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됐습니다. 지금의 여수를 중심으로 전라남도 동부 남해안을 지키는 해군 사령관이었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가자마자 한 일은 지역 주민들을 초대해 잔치를 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해군 사령관이 마을 잔치를 열었다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데요, 여기엔 숨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잔치에 온 주민들에게 밀물과 썰물이 언제 일어나는지, 바닷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암초가 어디에 많은지 등을 자세히 물었습니다. 바다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 것이죠. 그리고 배 갑판에 지붕을 씌우고 쇠못을 꽂은 신형 전투함 거북선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북선을 처음 물에 띄운 다음 날,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을 예상하고 미리 대비한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을 것입니다.암초 바다 아래에 있는 바위나 산호초 왜 한산도 앞바다였을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100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입니다. 당시 왜군은 상대방의 배에 기어올라 공격하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그 점을 잘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왜군이 배에 침입할 수 없는 구조로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이순신은 또 조선의 화포 기술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조선의 화포는 사정거리가 1㎞ 안팎으로 일본군의 조총(100m)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일본 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포로 공격하는 전술을 펼쳤습니다.화포 화약을 사용해 탄환을 쏘는 무기 한산도대첩 때 일본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데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머물고 있던 경남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견내량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은 곳입니다. 조선의 주력선이던 판옥선은 일본군 배보다 크기는 컸지만, 속도가 느려 좁은 바다에서 싸우 기엔 불리했죠. 그래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해 화포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바다에서 사용한 육지 전술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에서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학익진’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학익진의 핵심은 군대가 일자로 서 있다가 좌우 양 끝의 군사들이 빠르게 달려 나가 적을 포위하는 것인데요, 바다에선 배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 사용하기 어려운 전술이었죠. 하지만 이순신은 그런 고정 관념을 깨고 바다에서 학익진을 활용했습니다. 배를 빠르고 일사불란하게 조종할 수 있을 만큼 조선 수군의 훈련이 잘돼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평화 시에도 전쟁에 대비하고,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을 철저히 분석하며,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혁신적 전술을 선보인 이순신의 리더십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사람들이순신의 든든한 백 류성룡이순신은 임진왜란 직전 무려 일곱 단계를 승진해 전라좌수사에 임명됩니다. 그 배경에는 어릴 적 한마을에 살며 이순신을 눈여겨본 류성룡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의정이던 류성룡이 이순신을 선조 임금에게 추천한 것이죠. 류성룡은 임진왜란 중 영의 정으로서 전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습니다.이순신과 찰떡궁합 이억기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 우수영 등 여러 지역 수군을 연합해 전투에 나섰는데요, 그중에서도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이순신과 호흡이 잘 맞는 장수였습니다.한산도대첩 때도 이억기는 판옥선 25척을 이끌고 이순신과 합세해 대승을 거뒀습니다. 우리 해군 잠수함 ‘이억기함’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이순신의 신의 한 수 나대용거북선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이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려면 배를 만드는 전문 기술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순신이 수소문 끝에 찾아낸 사람이 군관 나대용이었습니다. 나대용은 이순신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거북선과 비슷하게 생긴 배의 설계도를 그렸어요. 직접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우기도 했죠.by 유승호 기자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보름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두 달 만에 평양까지 진격했습니다. 왜군의 거침없는 기세를 바다에서 막아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라 정확한 횟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순신 장군은 40여 차례 전투에 나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4월 28일은 479주년 충무공 탄신일이었습니다.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무공은 용맹한 군인이자 탁월한 전략가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기업 경영자들도 그의 리더십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승리했으며,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432년 전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한산도대첩부터 살펴보겠습니다.by 유승호 기자 한산도대첩 의의조선이 남해의 제해권을 차지해 일본군의 ‘수륙병진 작전’을 좌절시킴. 당초 일본은 육지로는 한양을 거쳐 평안도로 진격하고, 바다로는 남해와 서해를 통해 진격할 계획이었음. 이순신이 남해에서 일본 해군을 막아 내면서 이러한 일본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평안도로 진격한 일본 육군은 보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고립됐음.제해권 바다에 대한 지배력보급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을 공급하는 것 한산도대첩 결과· 일본 함선 73척 중 47척 격침, 12척 나포· 일본군 3000~9000명 전사(기록에 따라 차이)· 조선군 3명 전사, 10명 부상· 한산도대첩 다음 날 안골포(경남 창원시 안골동)에 정박한 일본 함대를 공격해 적선 20여 척 격침나포 배를 붙잡아 끌고 가는 것
요즘엔 주변에서 외국인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아요. 학교나 학원에 가면 외국인 선생님이 있고, 식당에서는 외국인 직원이 서빙하거나 주방에서 요리를 해요.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2023년 12월 말) 기준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250만7584명입니다. 대한민국 인구(5100만여 명)의 4.89%에 해당하는 수치예요. 100명 중 약 5명은 외국인인 셈이죠. 공부하고 일하러 우리나라에 머무는 외국인 250만여명 중 25%(62만6000명)는 관광객을 포함해 3개월 이내에 떠나는 사람들이에요. 나머지 75%(188만여 명)가 3개월 이상 한국에 살아요. 그중에서도 외국인 근로자가 가장 많습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의 20%(약 52만2571명)가 일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이에요. 아무리 한국인 직원을 채용하려고 해도 찾기 힘든 회사가 많거든요. 그럼 이 회사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할 수 있어요.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학위를 따기 위해 온 유학생이 9%(22만6507명)를 차지합니다. 한국인과 결혼해 이주해 온 결혼 이민자도 7%(17만4895명)에 해당해요. 여러 산업의 필수 인력 외국인 근로자는 우리나라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으로 일할 젊은이가 점점 줄어들고, 힘든 일을 꺼리는 내국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제조업, 농축 산업, 어업, 건설업, 서비스업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고 있어요. 최근 아이를 낳지 않는 저출산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맞벌이 부부를 지원하기 위해 외국인 가사·육아 도우미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많이 나와요. 집안일과 자녀 양육을 도와주는 직업입니다. 아픈 환자나 노인을 보살피는 간병인과 호텔 등에서 일하는 직원도 구하기 힘들어서 외국인 인력을 활용하자는 목소리가 커요. 그뿐만 아니라 교사, 대학교수, 연구원 등 전문 인력과 한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 직원 등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다양합니다. 외국인 근로자의 국적을 살펴보면 중국과 베트남, 몽골, 태국, 우즈베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가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다문화·다인종 사회 우리나라가 잘 살고 더 좋아질수록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 올 가능성이 높아요. 자기 나라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살기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우리는 더 다양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인종과 문화가 다양해집니다. 국제결혼이나 귀화를 통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문화 가정 2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죠. 이들 모두 한국인이에요. 통계청은 2042년에는 이주배경인구가 404만 명에 달해 우리나라 총인구의 8.1%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종이나 문화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외국인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거예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 우리 사회에 외국인이 늘어나면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생깁니다. 지난 3월 한국은행은 “국내에서 외국인이 가사·육아 도우미, 간병인으로 일할 경우 한국 근로자보다 임금을 더 적게 주는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1시간에 9860원이에요. 돌봄 인력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시간당 1만 원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어요.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외국인 인력에 대해서는 최저임금을 다르게 적용하자는 주장입니다. 한국은행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례를 들었어요. 이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또 체류 외국인이 많아질수록 미등록 외국인(불법 체류 외국인) 수도 함께 증가해요. 합법적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는 허가 기간이 만료됐는데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몰래 남는 거예요. 2023년 국내 체류 외국인의 16.9%가 미등록 외국인으로 집계됐어요.by 문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