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누군가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세상에서 일어난 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다. 내가 20대를 보낸 2010년대에 읽은 사랑 이야기는 대개 깊이 남았지만, 그중에서도 손꼽아 좋아하는 4편의 소설이 있다. 바로 <풀이 눕는다>(김사과)와 <백의 그림자>(황정은), <홍학이 된 사나이>(오한기), 그리고 <나의 사랑, 매기>.
그저 그런 불륜?…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이뤄내는 사랑
이 소설들의 사랑은 각각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지만, <나의 사랑, 매기>는 특히 사랑이 일상에서 자아내는 파열에 핍진하게 다가가 있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대학 시절 ‘나’와 매기는 연인이었지만 혼전 순결을 지키던 ‘나’는 군대에서 차여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동창회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들 사이에 감정이 샘솟지만, 매기는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상태다. 그뿐만 아니라 재연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매기는 ‘나’에게 가능한 한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제약을 덧붙이고 그것이 ‘나’의 심사를 한없이 비틀어간다.

“매기가 그런 규칙들을 늘리면 늘릴수록 나는 비참해져갔는데 매기는 그렇게 무너져가는 내 마음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인지,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악역을 맡아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런 상태를 감안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매기가 그쯤 이야기했을 때부터 위태로워지던 상황이었다. 그런 규칙들 속에 이 관계에 대한 은폐의 기도가 온통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어디에도 우리의 재회가 가져온 감정의 블루밍함에 대한 고려는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금지된 것은 흥미를 유발하고, 상상 속에서 그 모양과 색채를 다채롭게 부풀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금지된 사랑이 도파민이 폭발하는 찬란한 순간의 연속이 아니라 지리멸렬과 침울함, 모멸감으로 가득하다면 독자의 기대와는 다를뿐더러, 왜 그런 사랑을 놓지 않는지 의문이 들게 된다.

“매기를 사랑하고 나서 줄곧 나를 붙잡았던 의문은 왜 내가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였다. 그런데 적어도 9호선에 몸을 구겨넣고 만원의 상태를 견디며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 모두의 원인인 한강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매기와 나의 관계에서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내렸다는.”

몰두하고 있을 때는 바로 앞밖에 보이지 않지만, 한 발짝만 떨어지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회고에 깃들게 마련인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가 비로소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나’는 매기와의 위태로운 관계에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날을 파고들면서 깨닫는 것은, 자신도 매기를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진실이다. 매기는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나’와의 관계를 밝힐 결심을 했지만, 그 자리에 ‘나’는 늦었고 그런 관계를 마뜩잖아했던 친구는 냉담하게 비수를 꽂는다.

“언젠가 그런 사람을 연기하면 너의 그런 동작을 흉내 내겠다고. 그러니까 나처럼 어린 시절 집안 사정 때문에 충분히 책을 소유해 읽지 못하고 서점에서 읽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야 했던, 중학생 때부터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매기가 알기로는 가장 바람직한 주경야독의 완수자, 초등학교 때는 원예반을 하며 식물을 잘 길러 선생님의 난 화분을 돌보는 특임을 부여받았던 너라는 사람을 떠올리겠다고, 그런 너를.”

‘나’만이 상대와 관계를 바라보고 있던 것도 아니다. ‘나’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책의 상단을 움켜쥐듯이 잡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매기로부터 깨닫게 된다. 반면 ‘나’는 어떻게든 자신 아닌 다른 것을 탓하며 매기를 직면하는 시간, 즉 매기에게 ‘나’는 무엇이고 반대로 ‘나’에게 매기는 무엇인지 묻는 것을 미루고 피해왔으며 그렇게 사랑을 다질 적실한 타이밍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방안에 홀로 앉아 곰곰 깨닫고 있는 ‘나’의 뒷모습을 소설을 따라 그려보게 된다.

한때 나는 사랑 이야기를 도외시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4편의 소설도 처음엔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내기를 한사코 거부한 바 있다. 이야기를 곧잘 따라가다가도 사랑이 언급되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던 것으로, 도무지 발생 조건을 알 수 없는 그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 무엇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나조차도 나를 알 수 없는데,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이루는 사랑이 어떻게 생겨나며 지속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지나치게 고언을 아끼지 않는 내 친구에 따르면 내가 그간의 연애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굴었지만, 실제로 해냈던 것은 그저 흐리멍덩한 예스맨일 뿐이었단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가 싫었던 걸까? 이제서야 나는 너절한 나를 조금씩 꺼내보기 시작하고 있다. 흠을 잡기 어렵게 말간 얼굴을 한 적당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못나고 못된 구석을 감수하고 내면에 곧장 다가가는 다소 막무가내인 사람으로. 그후의 시간은 소설 속의 “내가 매기라는 쓰나미를 뒤집어쓰면서 매번 인생의 전도를 경험하는 것처럼” 온전히 계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스스로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격동에 휩싸여 매 순간 바뀌어가는 스스로를 목격하는 시간일 테다.

사랑은 영혼끼리 맞닿는 문제이며 일상을 직조하는 기초임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사람이 정말로 사람과 함께 사는 존재라고 역설하고, 그로써 사람이 언제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전까지의 내가 믿었던 한없이 매끄러운 사랑이야말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 관념에 불과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내 맘과 꼭 닮은 사람과의 사랑이라는 건 ‘나’와 사랑하는 자기애일 뿐은 아닐지.

자책과 질책으로 가득한 채 내면의 밑바닥으로 한없이 하강하는 <나의 사랑, 매기>가 왜 내게 그렇게 와닿았는지. 바로 소설 속에 인용되는 바이런의 구절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다”와 같이, 자기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해서는 결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간곡히 사랑을 당부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 바깥의 내가 소설 속 ‘나’의 시간을 역산하며 교훈을 셈하곤 하듯이, 한 소설이 어떤 시행착오를 먼저 겪으며 독자들에게 돌다리가 되어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쉽다. 하지만 그런 경박한 쓸모에 휘둘리기에 <나의 사랑, 매기>의 처절한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묵직하고 애달프다. 그런 계산이 아니더라도 사랑이란 무엇인지, 가장 낮은 자세로 묻는 이 소설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는 아무래도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