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우리가 놓쳤을 위대한 작은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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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지보다 중요한 건
'이르는 길'에 마주하는 사소함
김현호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
'이르는 길'에 마주하는 사소함
김현호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는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은 너무도 유명해서 독서에 큰 뜻이 없는 사람들조차 다 안다. 그런데 문득 작품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자 주인공이 도달하게 되는 ‘설국’보다 그 ‘터널’ 속 풍경과 단지 통과하느라 지나친 주변 마을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지난가을, 어쩌면 <설국>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한 번쯤은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본 중북부 산악지대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나고야에서 출발해 은둔의 마을 시라카와고, 가나자와 등을 여행했는데 어림잡아 60여 개의 터널을 연이어 지나야만 했다. 그 ‘국경의 긴 터널은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계절상 터널의 끝에 설국이 펼쳐질 리는 없었지만, 이국적 농촌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국의 소도시와 산간마을처럼 일본의 산악지대도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긴 터널과 잘 닦인 고속도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은 지 수백 년 되었다는 농가의 고택은 제주의 방풍림처럼 집터 주변을 나무로 둘러쌌는데, 관광지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옛 권력자들의 성채보다 더욱 근사했다.
여행을 시작한 후 목적지만을 향해 무심코 풍경을 지나칠 때마다, 보물 같은 장면들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랜드마크’라는 이름의 목적지보다 그곳까지 ‘이르는 길’에 더 관심을 둔다. 비행기 안에서 착륙 직전 바라본 호주 시드니의 도시 풍경, 멜버른 와인 농장으로 이동하며 마주한-마치 하나의 악보 같았던-목가적 풍경들 말이다.
포르투갈의 포르투서 리스본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지나는 정거장마다 이야기가 가득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교육 도시 코임브라역부터 세계적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오리엔테 역사의 나무를 닮은 철재 구조물까지, 자칫 지나치기 쉬운 장소를 온몸으로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고개를 잠시 돌려’ 구경한 작은 풍경과 오래된 이야기다.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한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 ‘애프터 양’(2022)에는 인공지능 로봇 ‘양’이 등장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양이 떠나간 이후’ 비로소 영화는 시작된다. 인공지능 로봇이었던 ‘양’의 기억저장소를 열람하며 함께 세월을 보낸 가족은 눈물을 흘린다. ‘양’을 영원히 떠나보냈다는 아쉬움도 컸을 테지만, 기억저장소에 보관된 영상을 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주의 별처럼 펼쳐진 ‘양’의 기억저장소에는 인간 가족과 얽힌 추억이 담긴 장소를 비롯해 ‘그야말로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 가득 차 있다. ‘양’은 숲의 녹음, 벽에 드리워진 아침 햇살과 나무 사이로 지는 해넘이를 소중하게 기록해 놓았다.
다만, 영화와 상관없이 우리는 알고 있다. 오랜 사진 귀퉁이 한쪽마다 볼품없이 쌓아 놓은 책더미, 낡은 책상, 빛바랜 장난감, 차려입지 않은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 등이 우리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종종 작은 목표에 집착한 때가 있다. 그때 원인 모를 불안함을 느낀 이유는 아마도 ‘출발지’와 ‘목적지’에만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좁은 생각 때문이었던 건 아닐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두리번거리며 사소한 풍경을 바라볼 줄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오늘의 산책에선 고개를 돌려 조금은 다른 장면을 보기를,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나날이 되기를.
지난가을, 어쩌면 <설국>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한 번쯤은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본 중북부 산악지대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나고야에서 출발해 은둔의 마을 시라카와고, 가나자와 등을 여행했는데 어림잡아 60여 개의 터널을 연이어 지나야만 했다. 그 ‘국경의 긴 터널은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계절상 터널의 끝에 설국이 펼쳐질 리는 없었지만, 이국적 농촌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국의 소도시와 산간마을처럼 일본의 산악지대도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긴 터널과 잘 닦인 고속도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은 지 수백 년 되었다는 농가의 고택은 제주의 방풍림처럼 집터 주변을 나무로 둘러쌌는데, 관광지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옛 권력자들의 성채보다 더욱 근사했다.
여행을 시작한 후 목적지만을 향해 무심코 풍경을 지나칠 때마다, 보물 같은 장면들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랜드마크’라는 이름의 목적지보다 그곳까지 ‘이르는 길’에 더 관심을 둔다. 비행기 안에서 착륙 직전 바라본 호주 시드니의 도시 풍경, 멜버른 와인 농장으로 이동하며 마주한-마치 하나의 악보 같았던-목가적 풍경들 말이다.
포르투갈의 포르투서 리스본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지나는 정거장마다 이야기가 가득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교육 도시 코임브라역부터 세계적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오리엔테 역사의 나무를 닮은 철재 구조물까지, 자칫 지나치기 쉬운 장소를 온몸으로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고개를 잠시 돌려’ 구경한 작은 풍경과 오래된 이야기다.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한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 ‘애프터 양’(2022)에는 인공지능 로봇 ‘양’이 등장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양이 떠나간 이후’ 비로소 영화는 시작된다. 인공지능 로봇이었던 ‘양’의 기억저장소를 열람하며 함께 세월을 보낸 가족은 눈물을 흘린다. ‘양’을 영원히 떠나보냈다는 아쉬움도 컸을 테지만, 기억저장소에 보관된 영상을 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주의 별처럼 펼쳐진 ‘양’의 기억저장소에는 인간 가족과 얽힌 추억이 담긴 장소를 비롯해 ‘그야말로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 가득 차 있다. ‘양’은 숲의 녹음, 벽에 드리워진 아침 햇살과 나무 사이로 지는 해넘이를 소중하게 기록해 놓았다.
다만, 영화와 상관없이 우리는 알고 있다. 오랜 사진 귀퉁이 한쪽마다 볼품없이 쌓아 놓은 책더미, 낡은 책상, 빛바랜 장난감, 차려입지 않은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 등이 우리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종종 작은 목표에 집착한 때가 있다. 그때 원인 모를 불안함을 느낀 이유는 아마도 ‘출발지’와 ‘목적지’에만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좁은 생각 때문이었던 건 아닐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두리번거리며 사소한 풍경을 바라볼 줄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오늘의 산책에선 고개를 돌려 조금은 다른 장면을 보기를,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나날이 되기를.